傳神寫照(정신이 전해져 그림으로 드러남)
1. 초현실주의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흐르는데
나는 기억해야 하는가
기쁨은 늘 괴로움 뒤에 온다는 것을
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i라는 다소 기이한 본명을 가진 Guillaume Apollinaire(기욤 아폴리네에르)의 유명한 시 “미라보 다리”의 일부분이다. 프랑스 파리 시내를 관통하는 센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수는 2023년 기준 37개로 알려져 있다. 미라보 다리도 그중 하나다.
아폴리네에르는 처음으로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Surrealism)라는 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처음에는 쉬르나튀랄리즘 즉 초자연주의超自然主義라는 말을 사용할까 고민하다가 그만두고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한다. 이 초현실주의는 20세기 초 예술의 전 영역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중 시각예술, 특히 회화(미술)에 있어 매우 주목할만한 결과물을 창조해 낸다.
이미 20세기 초 ‘구상’을 버리고 ‘비구상’을 택한 Wassily Kandinsky를 시작으로 하는 추상미술이 전 유럽을 흔들었다. 이 추상예술의 바탕에는 마르틴 하이데거로부터 비롯된 해석학(엄밀하게 말하자면 실존철학의 한 갈래)적 시각이 깔려 있고 더 나아가 메를로 퐁티로 대표되는 “몸의 철학”이 예술에 반영된 것이었다.
추상의 한 영역으로 분류되는 초현실주의는 구상의 틀을 포기하지는 않으면서 실존철학을 사물의 해석적 도구로 사용하고 동시에 20세기 심리학의 꽃으로 불리는 프로이트의 “꿈”의 심리학(정신 분석)을 그림으로 끌어들여 무의식이 주는 관념적 세계를 구상의 방법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2. brain fade(지루함)
화면에 있는 짐승은 표범인지 치타인지 불분명하다. 바닥에 앉아있지만 허공이다. 그림자가 비치지만 광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앞쪽에 그림자로 보아 짐승의 머리 뒤쪽 어딘가에 빛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림은 서양의 초현실주의의 기법과 요소가 있지만 나는 동양의 시각으로 접근한다.
중국 남조南朝시대 유의경(劉義慶, 403∼444)이 편찬한 『세설신어世說新語』의 ‘교예巧藝’ 편에 "동진東晉시대 화가 고개지(顧愷之, 348~409)가 인물화를 그리면서 수년 동안 눈동자를 찍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자 고개지가 말하기를 "몸의 사지가 잘생기고 못생김은 원래 독특한 기품이나 오묘한 부분 같은 것과 관계가 없다. 그림 속에 정신을 전하여 묘사하는 것은 바로 눈동자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부점목정不點目睛을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유소(劉卲 176~245)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인데 유소는 당시 화론서에 해당하는 『인물지人物志』에서 ‘형질정성론形質情性論’ 즉 육체와 정신, 내면과 외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서 외적인 형체, 골상骨相, 언담言談, 거지擧止 등을 통해 내적인 정성情性, 심리, 지혜, 재능, 품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동양회화미학(1994), 최병식 지음, 동문선. 48쪽)
이 그림에서 짐승의 눈은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머지 요소, 즉 짐승의 외적인 형제와 골상, 그리고 짐승의 거지(태도와 자세)는 바로 이 그림을 그리는 작가 자신의 정성情性과 심리 품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거기에 작가 스스로 지루하다는 표제를 붙였다. 지루하다는 것은 하고자 하는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욕이 없는 상태가 오래 계속된 상태이다. 짐승의 목적 없는 눈빛이 그것을 설명한다.
치명적인 이빨, 그리고 엄청난 치악력과 날카로운 발톱, 폭발적 스피드를 가진 고양잇과 짐승 중에 최상위를 차지하는 표범 혹은 치타(그림의 짐승)등은 조심성이 많지만 의외로 사냥 성공률은 떨어진다. 이들은 독립생활을 하는 이유로(사자를 제외한 고양잇과 짐승들은 대부분 독립생활을 한다.) 먹잇감이 없을 때에는 더러 굶어 죽기도 한다. 새끼를 키우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혼자서 사냥하고 혼자서 생활한다. 사자와 같이 무리 생활을 통해 불명예의 상징이 된 개과의 하이에나와는 달리 표범이나 치타는 고독한 짐승이다. 이렇게 자초한 고독은 때로 명예가 되기도 한다. 바로 이 지점에 작가는 이 고독한 짐승에게 자신을 이입시켰을 것이다. 역시 이 지점이 전신사조傳神寫照(정신이 전해져 그림으로 드러남)의 순간이기도 하다.
짐승의 그림자를 가늘게 흔드는 것을 나는 빗방울의 흔적으로 보려 한다. 아니 빗방울일 것이다. 화면 전체를 지배화는 황색은 분명 아프리카의 색이다. 표범이나 치타가 사는 아프리카 남동부 지역(세렝게티 평원 – 마사이족 언어로 끝없는 평원이라는 뜻)에 이제 막 우기가 시작된 것이다. 건기의 메마른 대지는 분명 황색이다. 하지만 저 몇 개의 빗방울이 폭우가 되어 내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녹색의 초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작열하는 태양아래 짐승은 홀로 앉아있다. 건기의 끝, 이미 초원을 찾아 떠난 톰슨가젤(영양 이름)도 없으니 아마 저 짐승은 오래 붉은 피를 맛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화면을 지배하는 황색은 사실 무색이다. 황색에 대하여 괴테는 그의 색채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1부류의 굴절색에서 태양의 빛이나 공기 속에서 타오르는 인광과 같이 최고도의 에너지를 가진 빛은 눈을 부시게 하는 무색이다. 그러나 이 빛은 조금이라도 흐린 매질을 통해서 보면 대부분 황색으로 나타난다.(색채론(2016),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장희창 역, 88쪽)
엄청난 태양 에너지의 무색의 광선은 이미 말라버린 세렝게티 초원의 열기라는 매질을 거치면서 황색으로 변하였고 그 빛을 작가는 나름의 조색調色을 통해 화면의 저 빛으로 구현한 것이다. 그 위로 시간에 의해 색채가 바래지고 간혹 무심한 세월처럼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