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子』 읽기, 그리고 Dogma

by 김준식

『莊子』 읽기, 그리고 Dogma


어린이날 아침 비가 억수같이 온다. 실외에서 어린이날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셨던 모든 사람들이 낭패를 볼 만큼 비가 많이 온다. 어린이날 이렇게 폭우가 쏟아진 것은 거의 기억에 없는데 기후변화가 가져온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난감하고 착잡해진다.


내가 알고 선생님 중에 마치 수행자처럼 연구와 글쓰기를 하시는 선생님이 계신다. 아침에 그 선생님의 글을 페북에서 마주했는데, 선생님의 말씀 중 ‘Dogma’라는 단어가 무겁게 와닿는다.


1. Dogmatic slumber(독단의 잠)*


칸트가 흄의 이론 일부를 수용하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그렇다! ‘독단’은 거의 잠자는 것과 같다. 어떤 말도 어떤 표시도 알아차릴 수 없는 상태가 ‘수면睡眠’의 상태다. 따라서 수면 상태와 비슷한 독단은 상당한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때로 편협함의 징표가 되기도 한다.


Dogma가 위험한 이유는 단적으로 ‘무비판적 태도’에 있다. 무비판적 태도의 이면에는 고착화된 생각과 그 고착함을 유지시키는 기계적 사고의 작용이 존재한다. 그렇다고 비판만이 능사는 아니다. 지나친 비판은 혼선을 빚는다. 뭐든 지나치면 모자란 만 못하다. 어쨌거나 독단의 핵심은 무비판적 태도라는 것이다.


극단적인 이념이나 태도가 가져온 인간 삶의 비극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그러한 독단에 자주 빠지거나 혹은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독단인 줄 모르고 사는 대부분의 우리가 더 문제라면 문제다.


2. 『莊子』 읽기


장자가 생존했던 기원전 4세기 중국은, ‘전국 시대’(기원전 5세기~3세기)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쟁의 시기였다. 7개의 강력한 제후국들이 죽기 살기로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던 그 시기를 살아낸 인물이 바로 ‘장자’다.


자고 나면 누군가 죽거나 다치거나 잡혀가는 그야말로 불안과 절망의 시대를 살아낸 ‘장자’에게 있어 자유는 최상의 가치였을 것이다. 고통과 죽음으로 가득한 현재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의 문제를 언제나 무겁게 들고 있었을 ‘장자’에게 '공자'의 명분이나 예의 따위는 오히려 사치스러운 생각이었을 것이다. 극단적인 현실주의, 현세주의에 기반한 ‘장자’의 자유는 인간 존재의 문제 그 자체였다.


‘장자’보다 200여 년 앞서 살았던 ‘공자’는 이미 기울어지고는 있었지만 그나마 위신을 세우고 있던 주 왕실과 5개의 제후국들이 최소한의 균형을 이룬 세상에 살았다. 그래서 강조한 것이 도덕규범이었을 것이다.


‘장자’나 ‘공자’ 모두 인간의 마음에 대하여는 비관적이었다.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나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남을 알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논어』 학이) 벌써 인간에 대한 비관적인 선입견이 찐하게 느껴진다. ‘공자’쯤 되지 않고서는 모두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에 온 마음을 쓴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而不可係者 其唯人心乎”(붙들어 둘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 『장자』 재유) ‘장자’는 인간의 마음을 좀 더 극단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해결 방법이 다르다. ‘장자’ 또한 ‘공자’와 마찬가지로 인간관계의 규범이 되는 도덕의 필요성을 수긍했다. 하지만 도덕규범이 인간존재의 실상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인간마음의 미묘한 사정을 면밀히 통찰하여 만들어져야 하는데, ‘공자’의 도덕규범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았다.


하기야 ‘공자’ 자신은 언행이 일치하고 권력에 야합하지 않은 위대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공자’ 이후 ‘공자’ 학파는 공허한 형식화에 치중하고 정치권력과 야합했으며, 규범과 존재,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망각함으로써 규범 자체가 인간을 속박하는 질곡과 허위가 되고 위선이 되어 인간 본래의 면목을 왜곡했다. 그러한 사정을 알고 있었던 ‘장자’는 결코 ‘공자’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유교 경전처럼 ‘자왈’로 시작하지 않는 『莊子』에서 자주 쓰는 방법은 시험 삼아(청상請嘗)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언어적 표현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 자체에 매몰되는 순간, ‘장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언어에 대한 참된 뜻은 간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자’가 가장 싫어했던 것 역시도 독단이었다.


‘장자’가 선택한 또 하나의 언어의 특수한 사용방식은 ‘무위유위無謂有謂’ ‘유위무위有謂無謂’이다. 즉 ‘말없이도 무언가를 말하고’, ‘말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상태’가 그것이다. 이는 ‘말 없는 말’ 즉 ‘불언지변不言之辯’과도 일맥상통한다. 말에 집착하지 않고 그 말의 한계를 너머 의미하는 진정한 뜻을 파악한다면 우리는 세속의 밖에서 거닐고 있는 수 있는 ‘장자’의 도의 경지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3. 『莊子』적 Dogma


하지만 ‘장자’ 이야기 역시도 독단의 늪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다. 이미 역사에서 우리는 ‘죽림칠현’이나 후한 말기의 황건적을 통해 그 독단의 결과를 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독단에 빠지지 않으려는 것 또한 독단일 수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莊子』를 공부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마 2005년쯤으로 기억한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서삼경’에 빠져 있던 스스로에게 뭔가 탈출구를 제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서삼경 공부는 내 삶의 행운인지 아니면 불행인지 몰라도 아주 어렸던 5살 시절부터 줄곧 읽어 왔고 그 틀 속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냈다. 2005년은 그런 내 삶의 전환기였다.


2013년경부터는 다른 사람들에게 『莊子』강의를 시작했고, 2017년에는 그러한 생각을 바탕 삼아 서양 미술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식으로 『장자, 오르세를 긷다』(부끄끄, 2017)라는 다소 건방진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만들어내는 한시집의 용사用事 8~90%가 ‘장자’의 이미지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莊子』적 Dogma에 빠져들었다. 지금은 내가 『莊子』적 Dogma에 빠져 있음을 알고 있으며 더 깊이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일련의 상황 속에서 나는, 이런 생각에 도달한다. 어쩌면 독단은 ‘해악’과 ‘기준’ 그 사이 어디쯤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필요한 경우와 필요 없는 경우가 자주 교차한다. 하지만 구분이 쉽지 않다. 다만 주변의 모든 이야기가 어느 순간 작아지거나 사라지면 그 순간 독단의 늪 한가운데 있음이 분명하다. 안타까운 것은 칸트 조차도 자신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독단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우리는!


* Man and His Gods, Smith, Homer W. New York: Grosset & Dunlap. 1952. 404쪽 “수년 전 처음으로 나의 독단적인 잠을 깨고 사변 철학 분야에 대한 나의 연구에 완전히 다른 방향을 제시한 것은 David Hume에 대한 기억임을 자유롭게 인정합니다.”(‘Kant and Hume on Causality’. The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Metaphysics Research, Stanford University.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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