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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12. 2023

두 개의 다른 생각



1.     음악


음악 감상은 다른 예술과 달리 시간이라는 매개 변수가 작용한다. 단번에 직관으로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호하고 동시에 불완전하다. 대부분의 예술들은 시각에 의존하지만 음악은 청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좀 더 엄밀해지거나 혹은 좀 더 복잡해진다. 인간의 감각기관 중에서 눈보다는 귀가 좀 더 분별력이 높기 때문이다.(불교에서 말하는 감각의 위계, 즉 색, 성, 향, 미, 촉의 5감) 거기에다 시간의 변수는 이 감각을 유지시키는 굉장한 에너지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집중해야 하거나 혹은 분석해야 할 것이 많아지는 이유가 시간이라는 변수를 가지는 음악의 본성 때문인 셈이다.


Alexander Porfir'yevich Borodin - Symphony No. 2 1st Mov. Allegro b단조 2/2.

일리야 레핀이 그린 보로딘

보로딘은,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발라키레프, 큐이와 함께 러시아 5인조로 유명하다. 이들은 러시아의 국민음악 운동의 선구자로서 활약했고, 많은 명곡을 러시아 민족주의를 위해 바쳤다.


보로딘은 의사가 본업이었지만 음악 역시 대가였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러시아 민족주의적 경향, 즉 슬라브 특유의 리듬과 음색을 가지고 있다.


이 음악, 교향곡 제2번 b단조 1악장은 현악과 금속성 관악의 합주로 매우 깊고 두텁게 시작하는데 뒤 이은 목관의 연주가 그나마 부드럽게 곡을 인도한다. Poco meno mosso, 즉 ‘점점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라는 악상기호처럼 1악장은 휘몰아치듯 연주되지만 혼란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곡은 매우 무겁고 장중하다.


당시 러시아는 로마노프 왕조가 쇠퇴하고 농민 반란이 곳곳에서 있었으며 나폴레옹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황이었다. 민족적 자존심과 함께 경제적 어려움 등이 오래된 제국을 흔들고 있던 당시 보로딘은 민족적 정신의 회복을 통한 위대한 러시아를 꿈꿨다. 하지만 그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혁명을 통한 로마노프의 전제정이 무너지게 된다. 


보로딘은 유럽 세계 전체에 알려진 최초의 러시아 작곡가로서 폴란드 방문 당시 위대한 피아니스트 리스트의 영접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2.     미메시스와 이미타티오


일본 전통의 古都인 교토 시내 전통가옥 내부의 정원을 보면 누구라도 기막힌 그들의 솜씨와 어울림에 혀를 내 두른다. 특히 긴가쿠나 기요미즈 사원의 정원은 거의 절묘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들이 만든 모든 것들은 자연을 기초로 하지만 자연을 그대로 둔 것은 거의 없다. 자연을 모방하기는 하지만 장인의 손이 어느 곳 하나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그야말로 완벽한 자연의 재구성이다. 즉, 자연을 그대로 가져와 장인의 손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인공적인 자연을 일본 사람은 진실로 자연이라고 여긴다. 

일본 정원

자연을 가져와 특정한 곳에서 축소한 상태로 그 자연을 모두 볼 수 있게끔 만드는 그들의 기술, 혹은 예술 때문에 서양인들은 오래전부터 일본에 열광했고, 그것은 17~9세기 유럽에 전해져 자포니즘을 형성하게 된다. 이 자포니즘은 우리가 잘 아는 서양화가들(마네, 모네, 고흐, 르누아르 등)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쳐 인상파라는 하나의 예술적 유형의 창조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일본의 방식을 우리는 Imitátĭo(재현, 모방, 흉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예술은 일본에 비해 빈듯하고 심지어 약간은 무성의하게 보이기도 한다. 졸미(拙美)라는 아주 특이한 미적 기준은 우리 예술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건축예술 중 하나인 불국사 기단 축대(불국사는 조선시대에 재건축되었으나 축대는 통일신라 그대로이다.)로부터 오래된 목조건축의 주춧돌 모양, 그리고 사찰들의 정원, 조선시대 사원들의 정원, 그리고 대한민국 명승지 궁궐의 정원까지 자연적이라는 이름 하에 너무 자연스러워 거친 느낌마저 풍긴다. 그러나 그곳에 우리의 정서가 배어 있다. 자연을 그대로 닮아가고 싶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품으려는 우리의 태도가 거기에 있다.


이러한 우리들의 미적 세계는 그저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수사가 없다. 그저 마당 한쪽에 나무 한 그루 문득 심어놓고 가지가 처지든 휘든 그대로 둔다. 이것은 Mimesis(닮기)에 해당한다. 물론 미메시스나 이미타티오 모두가 닮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아주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가 있다.


일본 정원에 있는 소나무는 작은 솔가지 하나, 심지어 솔잎 하나조차도 그대로 두지 않는다. 방향을 잡고 목적을 두어 나무를 조정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재구성하여 새롭게 재현해야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옳다’ ‘옳지 않다’의 문제는 없다. 단지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영원히 근접할 수 없는 민족성이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이렇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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