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만족의 충돌
욕망과 만족의 충돌
노자도덕경 46장은 욕망에 대한 이야기다.
“罪, 莫大於可欲 禍, 莫大於不知足 咎, 莫大於欲得. 故知足之足, 常足矣.”
“욕심 날 만한 것보다 더 큰 죄가 없다.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다. 얻기만 바라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이 없다. 그러므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 영원한 만족이다.”
욕망의 속성은 만족을 모르는 것이다. 욕망은 무질서와 갈등(strife), 나아가 전쟁의 원인이 된다. 또 개인의 범위를 넘어선 욕망은 정치적 불안과 국가 간 혹은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다.
만족이란 얼마만큼 가졌는가와 무관하고, 다만 만족을 느껴야만 만족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니 늘 더 많은 것을 열망한다. 욕망이 일어나면 순식간에 중독되고 끝없는 순환에 빠져 벗어날 수가 없다. 오로지 만족과 중지를 깨우침으로써 욕망을 멈출 수 있다.
독일 청기사파 화가였던 프란츠 마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욕망과 만족의 충돌에 대한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Kämpfende Formen(싸우는 형태)로 표현된 변증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는 1880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풍경화 전문 화가이고, 어머니는 독실한 신교도(칼뱅주의자)로 마르크에게 부모의 영향은 매우 강렬하여 평생 동안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대한 의지를 작품으로 표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처음에 신부가 될 생각으로 신학을 공부했으나, 공부하는 동안 철학과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마침내 스무 살 되던 해에는 그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해 뮌헨 미술아카데미에 입학했다.
1910년 파울 클레의 친구이기도 한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를 만나면서 마르크의 색채에 대한 방향은 마케가 가졌던 추상적 색채의식과 혼융되어 마르크의 색채의식 속에 숨어있던 상징적인 잠재력을 일깨우게 된다. 1911년 러시아 출신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알렉세이 폰 야블렌스키(Alexej von Jawlensky)와 함께 신미술가협회를 창립했다. 이후 신미술가협회가 아카데미화의 길을 가자 여기를 탈퇴하고 칸딘스키와 함께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청기사파’를 결성하고 예술적으로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마르크는 색채의 사용에 있어 주로 빨강, 노랑, 파랑을 주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빨강은 물질적 이미지로, 파랑은 이성적 혹은 사유의 이미지로 사용하였으며 노랑은 주정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림 전체에 이 세 가지 색을 적절하게 분포시키고 혹은 섞기도 하면서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느낄 수 있도록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 그림은 푸른색이 지나쳐 거의 검은색을 띠는 색채를 그림의 핵심주제 중 하나로 사용하는데 아마도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이 컸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에 그려진 이 그림의 주제는 싸움, 즉 전투다. 이 그림을 통해 마르크는 파괴적인 묵시록과 유토피아를 동시에 표현하고자 했다.
그림에서 두 개의 큰 덩어리가 서로에게, 서로를 향해 비틀리고 구부러져 있다. 곡선으로 처리되어 있어서 정확하게 전 후를 구분할 수는 없지만 빨간색 모양이 공격하고 오른쪽의 진한 파란색-검정 모양은 후퇴하는 것처럼 보인다. 붉은색 모양에 좀 더 다른 의미를 부여하자면 부정형의 해파리에서부터 다른 시선으로 보면 다시 발톱을 가진 독일 독수리(Steinadler)의 이미지도 있다. 그리고 두 개의 형상(즉 빨강과 검푸른)을 형이상학적으로 확장해 보면 ‘정신과 물질’, ‘남자와 여자’, ‘전쟁과 평화’, ‘존재와 무’로 확장될 여지가 있다.
이 그림을 그린 2년 뒤 36세의 마르크는 죽음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