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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Apr 15. 2017

Chasse au tigre, 1854.

페이소스

Chasse au tigre, 1854. Oil on canvas, 73.5cmⅹ92.5cm

페이소스의 화가 Eugine Delacroix(외젠 들라크루아)의 

Chasse au tigre(호랑이 사냥), 1854.


Ferdinand-Eugène-Victor Delacroix(들라크루아, 1798~1863)는 19세기 전반, 서양 미술사의 중심인물로,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들라크루아는 이미 거장으로 명성을 떨쳤던 Jean August Dominique Ingres(앵그르)와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하였고 동시에 둘은 예술적 균형을 이뤘던 호적수이기도 했다. 


들라크루아가 아카데미적 전통의 일부를 허문 것은 사실이나 그의 예술 전반에는 여전히 아카데미적인 요소, 이를테면 장엄 양식(Grand Manner)이 스며있는데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그는 종교화와 르네상스의 전통을 잇는 장엄 양식의 마지막 대변자이자 서양 미술사에 등장한 최후의 역사화가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은 1832년 그가 북 아프리카(튀니지, 알제리)를 여행하고 그 지역의 문명에 충격을 받은 일련의 회화 중 하나로서, 비록 아프리카의 기억이 희미해진 20년 뒤의 작품이지만 아프리카 특유의 강렬한 색채와 생동감, 그리고 당시로서는 혁명적이고 실험적인 구도(構圖)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북 아프리카에 호랑이가 살았는지에 대한 자료는 불확실하다. 그림의 얼룩무늬로 보아서 분명 호랑이가 맞다. 그림의 제목에서도 호랑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하지만 호랑이는 수풀과 덤불이 무성한 아시아와 시베리아 지역에 서식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아프리카 초원 지역에는 서식하지 않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이 그림이 상상의 소산인지 아니면, 호랑이를 동물원에서 보고 아프리카 현지의 생활과 결부시켜 그린 그림인지는 모호하지만 호랑이의 움직임이나 표현의 방법에 있어서는 호랑이 사냥을 하는 장면 그대로의 현장감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지금의 파리 근교의 Saint-Maurice(생-모리스)의 상류 가정에서 1789년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은 제1공화정의 외교관이었다. 이런 출생의 배경은 그를 보수주의자로 만들었고 들라크루아가 생존했던 당시의 프랑스는 진보와 보수의 격랑이 몰아치던 혁명기이었지만, 그의 회화에서 혁명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 거의 유일할 정도로 그는 혁명에 냉담한 인물이었다.


한편 그는 매우 문학적이며 동시에 파토스적(Pathos – 페이소스는 영어 식 발음)인 면이 풍부한 화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관심과 애정을 가졌던 문학 작품은 평생 그의 회화에 영감을 주었다. 당시로써는 드물게 프랑스 문학뿐 아니라 외국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괴테, 쉴러의 독일 문학과 셰익스피어, 월터 스코트, 바이런 등의 영문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어린 시절에 문학 작품의 창작을 시도해보기도 했으며, 실제 문필가로서의 면모는 생전에 출판된 미술에 대한 에세이와 사후에 출판된 일기와 편지에서도 발견된다.


화가로서 회화의 대상을 분석하고 표현하는 태도의 중심에 페이소스(충동이나 정열로 풀이되는)가 있다는 것은, 그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화가의 페이소스를 그대로 느끼게 한다. 이 그림에서도 말과 사람 그리고 호랑이의 역동적인 모습, 또 화면의 위쪽으로 조금 보이는 짙은 하늘과 강렬한 대지와 암벽의 색채에서, 우리는 이 시기의 어떤 작품보다도 더 강한 그만의 페이소스를 감지할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아카데미의 전통을 이어받은 역사화가의 분류에 들라크루아를 두기보다는 오히려 낭만파 화가의 시작점에 들라크루아를 두고 싶어 하는지도 모른다.

 

장자 이야기


장자적 페이소스


장자 내편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응제왕의 핵심은 힘겨운 사유의 여정 끝에 장자가 도달한 그의 정신적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장자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힘겨운 사유의 끝은 혼돈(渾沌)이 아니라 그 혼돈의 죽음이었다. 혼돈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매우 주관적인 행동의 결과였다.


이야기는 이렇다. 


남해 임금 숙(儵)과 북해 임금 홀(忽)이 중앙의 임금인 혼돈(渾沌)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이 이들 숙과 홀을 매우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숙, 홀은 이 대접에 대한 보답으로 혼돈에게 매일 한 개씩 보고, 듣고, 먹고,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뚫어 주었는데 일곱 개의 구멍을 뚫자 혼돈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은 질서가 없는 혼돈이다. 그럼에도 숙과 홀은 그 알량한 주관적인 지식으로 혼돈을 자신들의 질서에 포섭하기 위해 혼돈에게 어떤 위험이 돌아갈 줄도 모르고 구멍을 뚫는다. 이것은 숙과 홀의 지극한 주관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즉, 숙과 홀의 매우 주관적인 알량한 경험과 지식 때문에 혼돈은 죽음에 이르고 만 것이다. 


여기서 장자가 이야기하려 하는 것은, 지식이란 오히려 인간에게 자기를 잃게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장자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또한 하나의 작은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인데 즉, 힘겨운 유위(有爲 ; 혼돈에게 구멍을 뚫어 준 일)의 결과는 어이없게도 무위(無爲 ; 혼돈을 죽게 만든 일)로 이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장자 응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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