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 도덕경 산책(39)

by 김준식

가을 햇살이 참 좋다. 점심을 먹고 학교 주변을 빙글빙글 돈다. 이미 자연은 긴 겨울 준비를 마쳤다. 아침에 찬 바람이더니 지금 바람은 시원하다. ‘차다’와 ‘시원하다’의 차이는 당연히 온도차이에서 온다. 하지만 그 기준의 문제는 절대적 온도 차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의 기준은 무엇인가? ‘절대’의 기준은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절대’라는 것을 인간의 인식 기준으로는 정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절대’의 상황과 느낌을 노자께서는 이렇게 비유하여 말씀하셨다.


大方無隅 大器免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대방무우 대기면성 대음희성 대상무형)

큰 네모는 모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이루어짐을 벗어났다.(즉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그 모양이 없다. [도덕경 41장 일부]


네 가지 야이기 모두가 우리가 알고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이야기들이라 우리의 부족한 판단으로 왈가왈부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우리의 판단으로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비 논리적이다.


다만 이야기 전체를 받아들임에 있어 우리의 알량한 분별심이 작동하지 못하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범위를 지나치게 넘어서 감히 판별할 수 없는 거대한 역설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수용하고 인지하는 대부분의 진리는 역설에 가깝다는 생각도 든다. 견고한 일상을 혁파하고 엉성한 논리를 뒤집는 것을 진리라고 가정한다면.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지구 같은 거대한 물체가 스스로 회전하고 또 태양을 공전하는데 진동이 없을 수 없다.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媒質, 즉 공기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지표에 있는 공기는 지구 자체와 같다. 즉 강력한 중력에 의하여 지구와 동일한 운동에너지가 가해진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 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매우 커서 설사 매질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다.(우리 귀는 매우 한정된 약 20~20000Hz 대역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2600년 전 노자께서 이 사실을 알았는지 또는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거대한 통찰의 결과 그러하다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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