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산길을 오래 걸었다. 11월 4일인데 더웠다. 이상한 일이다. 풍경은 가을인데 기온은 여름이다. 걸으면서 해 본 생각이다.
1. 직선과 곡선
직선의 곧은 모습이 왠지 자유롭지 않다는 편견을 오래 유지하다 보니 이제는 직선이 부자유로 정의되어 버렸다. 자유로운 직선이란 모순처럼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그렇게 느껴진다.
곡선의 부드러움과 자유의 이미지를 교묘하게 연결해 놓은 음모의 저의를 알 수는 없지만 바름, 곧음, 간단함, 명료함, 예리함 등이 자유와 동떨어진 것이라고 믿게 하는 데는 성공한 듯싶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앞의 단어들, 즉 바름, 곧음, 간단함, 명료함, 예리함 등은 자유와 반대에 있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한 자유 속에서 가능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명료함은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이며, 예리함은 둔감함으로부터 자유로움이다. 또 바름은 어지러움으로부터, 곧음은 무질서로부터 간담함은 복잡함으로부터의 완벽한 자유가 아닐까?
* 여기서 '자유'는 『장자』'제물론'에서 제시한 '진어무경振於無竟', 즉 경계를 떨친(없는) 경지라는 의미로 썼다.
2. 마음의 모습
'공자'는 제자들에게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서운해하지 않는” 군자가 되라고 가르쳤으나 제자들은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여전히 원망스러웠나 보다. 어느 날 제자들을 불러 앉혀 놓고 물었다.
“너희들이 평소에 말하기를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하는데, 만일 혹시라도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하겠느냐?”
이에 '공자'의 대표 제자라고 할 수 있는 '자로', '염유', '공서화' 등은 만승, 천승을 읊으며 정치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어떻게 굳힐 것인지 원대한 포부를 내세운다. 그런데 무심히 악기를 연주하던 '증철(석)'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이다.
“늦봄에 봄 옷이 이미 이루어지면 관을 쓴 어른 5,6명과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 쐬고서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논어 선진)
'공자'는 감탄하며 너와 함께 하겠다고 화답한다. 50이 넘은 노구를 일으켜 14여 년간 중원을 주유하며 무도한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의지를 실천한 이가 '공자'다. 그런데 이 대화는 진정 '공자'가 바라는 삶이 무엇인지 짐작케 하니 그의 행보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공자'의 이런 선택에서 '장자'가 말한 “부득이不得已한 삶” 의 모습을 본다.
하여 '장자'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장자'는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야말로 “그 능력 때문에 제 삶이 괴롭혀지는 셈”이라고 사당 나무가 된 상수리나무의 생에 빗대어 말한다.
“나는 쓸모 있는 데가 없기를 오랫동안 바라왔다. 가령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토록 커질 수 있었겠는가? 너도 나도 같은 하찮은 것이다. 어찌 서로 하찮다고 헐뜯겠는가?” (장자 인간세)
상수리나무는 스스로 하찮다 했지만 실제로 이 나무의 위용은 대단하다. “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가릴 정도이며, 재어보니 백 아름이나 되고, 그 높이는 산을 내려다볼 정도이며, 여든 자쯤 되는 데서 가지가 나와” 있다. 이런 나무를 보면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널을 짜면 곧 썩으며, 기물을 만들면 곧 망가지고 문을 만들면 진이 흐르며, 기둥을 만들면 좀이 생긴다”며 쓸모없다고 재단해 버리는 인간의 기준이란!
자연이 창조한 웅대한 장관을 있는 그대로 누릴 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의 초라한 정신세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장자'는 그런 인간들을 향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일상적 이해의 파괴를 요구” 한다.
3. 더 깊숙한 노자.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 無有入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무유입무간 오시이지무위지유익.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희급지.)"
"세상에서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 속으로 빠르게 들어가게 되고, ‘없음’은 틈 없는 사이에 있다.(비집고 들어간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이런 사실들을 통해) 무위가 이롭다는 것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 ‘무위의 이로움’, 세상에서 이것에 미치기는 어렵다.(별로 없다)" 도덕경 43장
'공자'나 '장자', '노자'의 이야기는 각각 다르지만, 천천히 오래 그리고 깊이 읽다 보면 작은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 '공자'는 언제나 형식과 격식, 의례를 소중히 여겼으나 돌연 '증철'이 말한 무위의 삶에 이끌린다. '공자' 스스로 살아 온 날들에 대한 기벼운 배신이 아닐 수 없다. 늘 '장자'당시 불행의 근원(?)을 '공자'의 예악으로 여겼던 '장자'는 처음부터 '무용지용'을 강조한다. '노자'의 생각은 '공자', '장자'생각의 기초에 해당한다. 즉 근본적으로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 내부에도 이와 같이 매우 다양한 생각들이 있다. 따라서 그 생각들도 일정한 통로를 가지고 있다. 그러한 통로들이 나의 내부에 수도 없이 조밀하게 뻗어있지만 정작 그 통로의 주인인 나는 전혀 그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등한시한다. 정말 우연하게 그 통로를 발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치열한 자기 수련을 통해서만 발견이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통로를 발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 통로 속에서 이루어지는 흐름과 방향을 이해해야 되는데 이 수준은 보통의 우리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가 되고 만다.
세상의 통로인 산길을 걸으며 '무위'를 떠올렸고, '무위'할 수 없는 나를 생각한다. 더불어 이런 생각들이 이루어지는 나의 내부에 있는 미세한 통로를 생각하고, 그 미세함 속으로 치빙馳騁하고자 하지만 곳곳에 장애만 가득함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