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Ästhetik

엄경근 신작에 대한 생각

by 김준식



이 그림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슬프다는 것보다 훨씬 더 짙은, 그리고 매우 묘한 감정이 나를 잠시 지배했다. 그 감정을 분석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는 그 감정에 충실하게 글을 쓰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엄경근은 서양화를 그리는 서양화가가 분명하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나 표현, 그리고 화면의 구성과 배치까지 서양화의 화법을 사용하고 있다. 빈틈없는 공간과 붓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완벽한 서양화다.


그런데 나는 그의 그림에서 동양의 공백을 느끼고 동양의 서툰 기교와 시간 밖에 있는 시간과 심지어 영적 공간마저 느낀다. 뿐만 아니라 굴원의 여운을 느끼고 장자의 무용을 느꼈다.


빌딩 숲이 안개 같은 불투명에 가려져있다. 그리고 그 뒤로 어두운 하늘과 엄경근의 달이 떠 있다. 결정적인 것은 뒤뚱거리는 버스와 억지로 빛을 내는 부스스한 가로등, 그리고 길조차 가려버리는 파도가 있는 풍경이다. 파도에 가려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은 화가의 시선이 매우 낮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의외로 버스는 매우 온전히 그려진 것으로 미루어 화가는 이미 논리적 기준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1. 영적 공간


엄경근 그림에서 달동네는 화가에게 영원한 공간이다. 그 달동네가 최근 그의 그림에서 점점 확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를테면 달동네라는 영적 공간이 조금씩 커지면서 다양한 주제를 끌어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엄경근 그림의 달동네는 논리성과 결별한 새로운 공간이며 동시에 화가의 내면에 깊숙하게 자리 잡은 영혼의 공간이다. 그 영혼의 공간이 이제는 조금씩 일상의 공간으로 확장되면서 마침내 우리가 보고 있는 바다와 버스, 그리고 가로등과 빌딩, 그리고 불투명한 하늘과 달이 되었다.


2. 사물을 슬퍼함


버스의 뒷모습이 이렇게 슬프게 보이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자 새로운 경지다. 왜 슬픈가? 초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인 비극의 굴원이 그의 초사에서 이런 글을 썼다.


왕자여불급往者餘弗及 래자오불문來者吾不聞 가는 것은 내가 미치지 못하고, 오는 것은 내가 듣지 못한다. 화면 속 버스의 느낌이 2300년 전 비운의 천재 굴원의 글 속에서 발견된다.


저 버스는 화면 속에서 시간의 표상이다. 화면 밖에서 달려와 화면을 가로지르는 버스에서 화가가 가진 근본적인 삶의 관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지나간 모든 것이며 다가오는 모든 것이다. 지나간 모든 것에 절대적으로 스며있는 것이 바로 슬픔이다. 그 슬픔은 지금 눈물을 흘리는 현재의 얕은 슬픔이 아니라 이미 화가의 가슴속 깊이깊이 감춰져서 이제는 투명하게 단단해진 과거의 슬픔이 저 버스로 불쑥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관람자인 우리를 향해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슬픔을 뭉텅뭉텅 던지고 있다. 물론 관람자는 모두 완전한 독립개체로서 그 어떤 연대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다.


3. 파도


제주 출신 강요배의 파도 그림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강요배의 바다, 흰 포말로 부서지는 제주 앞바다의 모습, 여백도 아니고 그렇다고 고흐가 그린 생 마리 해변처럼 몽상적인 바다도 아니다. 강요배의 바다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는 우리의 난제처럼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그전까지 볼 수 없었던 매우 생경한 느낌의 바다와 파도가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엄경근의 바다는 강요배의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와 전혀 다른, 또 다른 파도다.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파도는 결단코 아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잔잔한 파도도 아니다. 시간을 넘는 특정한 시간 속에서 넘실대는 저 파도는 엄경근의 달동네에서 자주 표현되던 암흑의 공간일지도 모른다. 화가 스스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세계가 저 검은 파도 밑에서 일렁거릴 뿐이다.


여전히 달은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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