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Ästhetik

환상과 일상의 교점

by 김준식
조은주, 『초설』 acrylic on canvas, 116.8 cm X 91.0cm, 2023


환상과 일상의 교점


1. 표현주의 그리고 폴록


서양 회화의 숙명은 화면을 빼곡히 채우는 것이다. 행여 빈틈이라도 생길까 꼼꼼하게 공간을 메운다. 동양화는 비워 놓은 모든 것이 안개가 되고, 강이 되며, 폭포가 되는데 서양 회화는 비운 곳이 있으면 미완성이 될 뿐이다. 조은주의 『초설』 또한 빈틈이 보이지 않는다. 완벽하게 화면을 채운 초록의 마삭줄과 검은 배경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작품을 처음 본 순간 엉뚱하게도 나는,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 ~ 1956)의 그림이 떠 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표현주의’가 떠 올랐다. 분명 이 그림은 구상화이고 마삭줄이라는 구체적인 ‘오브제’를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잭슨 폴락’과 ‘표현주의’가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표현주의(Expressionism)’는 엄격하게는 아니지만 독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19세기 내내 예술의 중심지가 프랑스 파리였던 것을 생각하면 분명 이례적인 일이다. 15-16세기 독일은 구텐베르크로 대표되는 인쇄술, 그리고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에 의해 발전한 동판화 등으로 유럽 르네상스의 기술적 영역을 견인한 국가이기는 하다. 하지만 18세기 부흥한 낭만주의 운동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이렇다 할 예술적 흔적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19세기말에야 겨우 하나의 국가를 이룬 독일이었는데 매우 우연하게 ‘표현주의’라는 새로운 예술사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와 대척점에 있다. 우리의 눈에 담기는 외부 세계를 그대로 담으려 하는 것이 인상주의라면 표현주의는 외부 세계를 자신의 관념에 투영시키고 투영된 것을 묘사하려는 것으로서 노르웨이 출신의 뭉크(Edvard Munch, 1863 ~ 1944)가 그 기점에 서 있다. 뭉크의 그림 속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와 그로부터 추출된 영혼이 표현되어 있다. 이 뭉크가 최초로 순회 전시를 한 곳이 독일(1892년 베를린)이었고, 여러 논란 속에서도 비교적 흥행에 성공했다. 당시 독일인들은 뭉크의 그림 속에 나타난 그의 회한과 번뇌에 진지하게 동조했다. 따라서 표현주의는 정신적인 것에 몰입하는 것을 즐겨하는 민족성을 가진 독일인들에 의해 확산되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은 반드시 붓으로 그려야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장한다. 물감을 캔버스에 뿌리고 심지어 통때로 캔버스에 들이부어도 된다는 생각 했고 또 그렇게 표현했다. 아마 이 정신이 그를 초현실주의 작가로 인정하게 하는 원인을 것이다. 폴록의 표현과는 완전히 다른 작가의 그림에서 폴록을 느낀 것은 바로 폴록의 그림에서 느낄 수 있는 반복과 질서의 리듬이었을 것이다.


2. 반복과 질서의 리듬


작가의 삶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는 아주 간단하다. 같은 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40대 여자 선생님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아주 우연하게 학교 단톡방에서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을 보았고 그 사진 속에서 이 작품을 본 것이다.


작품을 보는 순간, 주저 없이 글을 쓰고 싶었다. 사실 이 작품의 작가인 선생님과 나는 대화를 해 본 적도 거의 없다. 이 작품에 글을 놓을 수 있게 허락을 구하는 메시지가 공식적인 첫 대화였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인식을 바닥에 가깝다. 작품을 통해 작가의 내면을 읽어 내려는 다소 무모한 생각이 현재 상황이다. 천천히 작품을 본다. 사실 작품 자체도 실물을 본 것이 아니라 사진으로 본 것이 전부인 관계로 화면에 표현된 아크릴의 질감이나 붓의 터치나 터치의 강도, 빛과의 조화, 화면의 실제 색감 등은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이 글을 쓴다. 많이 무모하다.(실물을 보고 글을 고치면 된다.)


화면에서 보듯이 마삭줄의 형태는 거의 동일하다. 즉 이 작품의 객체인 마삭줄은 모양이 다를 수 있는 범위가 지극히 제한적이다. 제한적인 크기와 모양, 색조, 그리고 화면 내의 일률적인 배치는 작업을 하는 내내 다양성이라는 압박과 단조로움과의 대결로 작가의 머리를 복잡하게 했을 것이다. ‘플라톤’에 의하면 “아름다움이란 각 개체로부터 인지되는 감각적 성질이 아니라 모든 대상에 불변부동不變不動의 ‘형태’로 포함되어 있는 초감각적 존재이며 균형 ·절도 ·조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에 부여되는 이름이다.”라고 했다. (Sully, James "Aesthetics". Encyclopædia Britannica. Vol. 1 Cambridge University Press. 277~289 쪽)


작가는 마삭줄이 가진 동형同形에서 어쩌면 플라톤의 미적 세계, 즉 초감각적 존재이며 균형 · 절도 · 조화의 속성에 집중하였을 것이다. 플라톤의 이런 언급은 마삭줄이 가진 형태의 동일성 내부에 흐르는 미적인 반복과 질서, 그리고 리듬에 대한 언급일 수 있다. 화면 속에서도 비슷한 색채와 형태의 마삭줄이 반복되고 있지만 작가의 노력과 고민으로(의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일한 것은 쉽게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반복이라는 이미지는 어쩔 수 없다. 폴록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무질서의 반복에서 오는 묘한 리듬감이 매우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작가의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데 아마 처음 이 작품에서 폴록을 떠 올린 것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마치 사각뿔의 꼭짓점 중앙에서 빛이 비치듯 아래로부터 위로 향할수록 대상이 점점 밝아진다. 동시에 밑으로 내려 갈수록 빛은 어두워지고 마침내 검은색으로 통일된다. 이런 광원의 설정은 자연스럽게 채색이 동일해질 수 있는 위험성이 매우 크지만 채색의 동일성을 벗어나려는 작가의 노력은 눈물겹다. 거칠지만 분명하게 존재하는 리듬이 겨우 작가를 지탱하게 하지만 워낙 실물의 형태와 색채는 견고하다. 화면 밑으로 틀림없이 흐르고 있을 마삭줄의 변화(작가 내면의 풍경)가 작품의 관람자에게 읽히기는 어렵다. 다만 작가의 끈질긴 노력, 이를테면 각각의 잎이 가리키는 방향과 미세한 뒤틀림, 조도의 차이 채색의 강도로, 관람자에게 반복에서 오는 질서를, 그리고 미약하지만 리듬에서 오는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채색과 빛, 그리고 질감(마티에르)은 실물을 본 뒤라야 가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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