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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Apr 08. 2024

Raison d'être

Raison d'être


60대, 중년, 낯선 이야기이거나, 혹은 먼 미래의 일이거나, 또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줄로만 여겨졌던 이런 단어들이 어느 순간, 나의 현실이 되었을 때 느끼는 이 황당함이란!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당도한 60대를 살고 있는 나는, 여전히 다가올 70대와 그리고 그다음에 대한 어떤 준비도 없이 매일을 그저 황망하게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이내 무력감에 빠져들곤 한다. 


그렇다! 요즘 확실히 무력감을 느낀다. 봄 더위 때문인가 싶어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아침저녁으로 아직은 쌀쌀하지만 무력감은 별 반 차이가 없다. 나이에 따른 감정 변화인지 혹은 계절의 변화에 따르는 감정 변화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평소에 내가 가졌던 삶과 일에 대한 열정이 상당 부분, 어쩌면 매우 심각하게 줄어들었음을 발견한다. 하기야 몇 년 전 일기에서도 이 무력감이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런 경험은 일종의 반복학습처럼 내 심리의 주위에 늘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때가 되면 언제라도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처럼.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Carl Gustav Jung은 남성의 영혼을 ‘아니마 anima’라고 불렀다. 융에 의하면 중년의 남성이 겪는 이러한 심리적 공황이나 방황을 '밤바다 모험' 혹은 '여행'이라고 지칭했다. 인생에서 밤바다 여행은 여러 번 반복되는데 청소년기에 처음 경험한다. 그리고 3~40대의 청, 장년기에도 이 여행이나 모험을 거의 피하지 못한다. 융에 의하면 5~60대의 밤바다 여행은 거의 인생에서의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에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특별히 만들어진 용어가 '중년기'(Middle Age)라는 단어이다. 


본래 밤바다 여행(모험) 이야기는 성경의 '요나 이야기(욘 1~4)'에서 비롯되었다. 요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성경의 이야기와는 좀 다른 버전이다. 성경에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3일 만에 나왔다고 되어 있지만 이 이야기의 원형(히브리 원전-구약에 일부 인용)은 상당한 기간을 괴물의 뱃속에서 지내는 걸로 되어있다.) 


1. 어떤 영웅이 서쪽에서 물의 괴물(고래나 용)에 의해 삼켜진다. 

2. 그 괴물은 그와 함께 동쪽으로 여행한다. 

3. 그러는 동안 영웅은 괴물의 뱃속에서 불을 지피고, 배고픔을 느껴 괴물의 심장을 잘라낸다. 

4. 뒤이어 곧 그 괴물이 마른땅 위로 올라선 것을 알아챈다. 

5. 영웅은 괴물의 배를 가르고(입을 벌리고) 빠져나온다. 

6. 동물의 내장이 너무 뜨거워서 그의 머리카락은 모두 없어졌다. 

7. 영웅은 그와 함께 그전에 괴물에 의해 삼켜졌던 모든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은유, 혹은 알레고리가 숨어 있다. 


깊고 캄캄한 괴물의 뱃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왔던 타성대로 때 묻은 인생을 그대로 유지하며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머리카락을 온통 태우면서(기존의 것을 없애 버리고) 괴물의 심장을 잘라내고(권위와 절대적인 것에의 도전) 새로운 탄생을 모색할 것인지를 마지막으로 선택해야 하는 시기가 바로 중년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보니 더욱더 난감해진다. 나는 과연 현재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수 있는지? 혹은 지금 내가 저항하는 어떤 권위에 목숨을 걸고 도전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불가능의 결론을 내리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무력증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4월인데 벌써 낮은 덥다. 학교 뒤편 산은 이제 거의 연초록으로 변하고 있는데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초록이 번성할 것이다. 그런 풍경과는 달리 나의 오후가 책상 위에 놓인 커피처럼 다 식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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