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유세와 그람시
1. 선거유세
아침 출근길부터 저녁 퇴근길까지 대통령 선거 유세를 본다. 더러는 춤을 추고 또, 더러는 손으로 기호를 그리며 한 표를 애원하지만 왠지 모든 것이 아득해 보이는 것은 오직 나만의 경우일까?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후보이든 또 정말 싫어하는 후보이든 지금 선거 유세를 하는 선거운동원들과 그 후보들은 전혀 연결고리가 없다. 다만 그들은 하루 일당을 위해 다만 애쓰고 있을 뿐이다.
선거라는 독특한 양식은 잘못된 선택을 할 개연성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민주적 정치제도로 정착된 지금, 그 선거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것은 논리적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
다만 지금의 선거유세가 일당 외에는 대통령 후보와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선거 운동원들이 나서서 춤을 추고 하는 방식이 썩 달갑지 않다는 것과, 도대체 저 방식에 영향을 받아 어떤 후보를 선택할 사람이 현재 대한민국에 과연 몇 명이 있을 것이며, 또 그렇게 영향받아 후보를 찍는 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2. 안토니오 그람시
자본주의가 이렇게 오래 지속되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우수성 때문인가 아니면 외부적 요인의 끝없는 변혁과 개입 때문인가?
그람시는 이 문제에 집중하면서 자본주의의 유지 이유를 “문화적 헤게모니”에서 찾았다. 그가 말하는 “문화적 헤게모니”란 계급구조가 가지는 대립적 관계를 지배적인 권위와 경제적 풍요를 통해 지배 복종의 관계로부터 융합적, 통합적 관계로의 발전에 대한 묵시적 동의를 얻어내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지배계급의 강제와 동의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이 논리는 러시아 혁명 당시에 노동자 계급의 융합이라는 대의에 부합하기 위해 이미 그 기초로 제공된 바 있다.
그람시의 생각을 오늘날에 대입하여 본다면 이러한 정치적인 헤게모니의 장악은 경제적 종속의 관계에 대한 감각을 둔화시키고 동시에 도덕적 지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산되어 지배 계급의 정신을 거의 완전한 형태로 전파시킬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게 되고 최상층에 존재하는 자본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흠결을 보충하면서 동시에 그 위협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사전에 감지, 제거 혹은 수정함으로써 자본주의 생명력은 현재가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가 표현한 변형 주의나 확장적 헤게모니의 표현이 이러한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그람시의 생각이 오늘날에 완전히 부합하기는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참고사항조차도 되지 못한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로 진화하리라고는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자본주의의 유지 원인으로 본 도구로서의 “헤게모니”의 작용은 일응 이해되는 면도 있다.
우리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마취되어 그 효과로 많은 감각이 둔화되고 있다. 자본가들보다는 자본의 정신에 의해, 좀 더 상세하게 보자면 그 정신의 조건적 통제에 의해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
사실 이제는 어디서부터 자본주의인지 또는 아닌지에 대한 경계도 흐려져 있다. 따지고 보면 이 흐릿하고 불투명한 것 자체가 벌써 “헤게모니”에 의한 동의요 그 동의로부터 비롯된 동화이다.
이미 죽은 그람시를 통해 현재 살아있는 그리고 끝없이 유동적인 자본주의를 본다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람시의 치열했던 삶과 사상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 갈 것인가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