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근 화백의 새 작품을 소개한다.
루살카 '달에게 바치는 노래'
1. 인어
서양 문화의 여러 원류 중 오리엔트 문화는 그리스 문화에 녹아들었고 그리스 문화는 이오니아에서 번성하다가 안타깝게도 찬란했던 이오니아 문화는 역시 오리엔트에서 발생하여 전 유럽으로 퍼진 기독교 문화에 의해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 오리엔트 문화 중 현재의 시리아 지역 신화 중에 땅과 풍요의 상징이었던 ‘아타르가티스’는 동시에 생식의 여신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사의 여신이었던 그녀가 유한한 생명을 지닌 목동을 사랑하게 되었고, 여러 가지 이유로 심지어 그 목동을 죽이게 된다. 죄책감을 느낀 그녀는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을 물고기의 형상으로 바꾸게 된다. 하지만 여신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후 그녀는 배(복부) 위는 인간의 모습을, 아래는 물고기의 모습을 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인어(人魚, mermaid)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했다. 그 후 동서고금의 많은 이야기 속에 인어가 등장하고 때로 괴물로 때로 처연한 아름다움의 존재로 또 때론 동화 속 주인공으로 사람들 속에서 전승되고 있다.
2. 루살카
그 인어 이야기가 슬라브 족의 이야기로 전승되어 만들어진 것이 바로 '루살카'다. 슬라브 족은 현재의 동유럽과 러시아 지역에 퍼져 살고 있는 민족이다. 'Slav'는 노예의 영어 표현인 'Slave'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9세기 경 동로마 황제 오토 1세를 비롯한 정복자들에 의해 슬라브족이 유럽에서 자주 노예로 팔렸기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어쨌거나 '루살카'는 슬라브족들에게 익숙한 인어인데 강이나 호수 등 물 속이나 물가에 나타나며 정령이나 요정 혹은 물귀신이나 괴물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기도 한다. 러시아 이동전람파 화가 중 'Ivan Kramskoi(이반 크람스코이)' 그림 중에 루살카의 러시아 식 표현 ‘Rusalki’ (1871년)가 있다.
보헤미아(지금의 체코)의 '안토닌 드보르자크'는 ‘루살카’라는 표제로 3막의 오페라를 1901년 체코에서 초연했다. 우리가 잘 아는 음악인 ‘달에게 바치는 노래’는 바로 이 '루살카'의 아리아다. 아마도 엄경근의 작품 루살카…. 는 이 오페라에서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인어공주 이야기 그대로다. '루살카'가 강에 나온 왕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는데 '루살카'는 아버지(보드니크-강의 정령)에게 태양 아래서 왕자와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보드니크'는 딸에게 인간은 사악한 존재라고 경고하지만 사랑에 빠진 '루살카'에게 그 말이 들릴 리 없다. 정 많은 아버지 '보드니크'는 낙담에 빠지고...... 이때 '루살카'가 달에게 자신의 마음을 왕자에게 전해달라면서 부르는 아리아가 바로 '달에게 바치는 노래'다.
3. 엄경근의 묘사
작품 속에서 '루살카'는 돌아 앉아 있다. 더욱 처연해 보이도록 하는 작가의 솜씨다. 표정을 상상하게 하는 작가의 의도는 완벽히 성공했다. 달을 향해 '루살카'가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이 '루살카'에게 다가와 있다. 슬픔이 가득한 '루살카'의 하반신 비늘은 슬픔처럼 절망처럼 바람에 날리는 깃털이 된다. 그리고 아직은 목소리를 잃지 않은 '루살카'가 이렇게 노래한다.
“누군가 기다리고 있는지 그에게 말해주소서.
혹시 그의 영혼이 나를 꿈꾼다면
깨어있는 순간에도 나를 생각하게 해 주소서.
오, 달님이시여, 사라지지 마세요.
사라지지 마세요.”
'루살카'에게 멀리 있는 기도의 대상이었던 달, 그리하여 사라지지 말라고 간절하게 기도한 덕분에(?) 엄경근은 루살카 옆에 문득 그 기도의 대상인 달을 배치해버렸다. '루살카'의 마음을 이해한 엄경근의 배려일까? 작품 속 인물과 엄경근이 교류하고 있음을 엄경근의 표현으로 우리는 알 수 있다.
엄경근의 달이 이렇게 작가 자신에게 다가온 것은 최근의 경향이다. 이전의 그의 작품에서 달은 그래도 하늘에 존재했고 그 달은 희미한 빛으로 우리를 감쌌다. 엄경근에게 달은 어두운 달동네를 비추는 불빛이라기보다는 알 수 없는 희미한 상징이었고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쉽게 다가서지 않는 객체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달을 과감하게 관람자 앞으로 더 정확하게는 작가 자신 앞으로 당겨서 이제는 달을, 일정한 거리에 존재하는 상징적인 객체를 넘어 파악할 수 있는 실체로 변화시켰다.그렇다고 달이 가진 신비감을 버린 것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는 작가 자신의 극적인 감정 변화에 기초한다고 본다면 엄경근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사뭇 흥미롭다. 멀리 있는 달에 집을 지었다가 이제는 그 달을 아예 눈앞으로 가져온 것은 엄경근에게 일어난 감정의 변화가 일상적인 범위를 넘는다는 증거인데 이 변화가 가져온 그의 작품세계를 지켜보는 것, 우리에게는 색다른 기대와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루살카로 돌아가서,
초현실주의는 구상의 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실존철학을 해석학적 도구로 사용하고 동시에 20세기 심리학의 꽃으로 불리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을 그림으로 끌어들여 무의식이 주는 관념적 세계를 구상의 방법으로 표현하려 한다. 엄경근의 작품에서 자주 그런 흔적을 보았지만 이제는 분명하게 구상으로부터 나아가 초현실주의에 진입한 느낌이다.
‘후설’이나 ‘하이데거’는 20세기 이전의 철학에서 이성에 의한 실체파악을 맹비난하면서 이성을 통한 실체의 파악이야말로 실존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대신 그들은, 특히 하이데거는 실체의 파악을 이성이 아닌 실존 그 자체로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엄경근의 이 작품도 이성의 관점으로 본다면 비 논리성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초현실주의적 관점으로 본다면 루살카의 간절함과 루살카 자신의 비극적 처지에서 비롯된 슬픔은 날리는 깃털로 표현되어 화면의 일부를 점유하고, 처연한 그믐달은 엄경근 자신이 가진 새로운 변화와 방향에 대한 표상으로 화면 속에 존재한다. 그런가 하면 바다로 추정되는 실체는 루살카와 달을 떠 바치는 구조로 존재할 뿐이다. 세 객체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결구조가 존재하지 않을 수(어쩌면 논리적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관람자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아니 경험적으로 대상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노력을 내려놓는 순간, 엄경근의 작품에서 우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