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로 풀어보는 엄경근의 그림
법성게: 중국에 가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한 의상義湘대사가 그 경의 핵심 내용을 7언 30구 210자로 표현한, 의상스님의 탁월한 안목과 지혜, 간절한 자비심이 담긴 게송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깊다 하는 대방광불화엄경을 축약해서 그 진수를 뽑은 글이다.
1. 無量遠劫卽一念(무량원겁즉일념)
밤이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검은 밤하늘에 생각만큼 많은 별이 떠 있다. 아주 오래된 생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생각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반짝거린다.
별들은 사실 수 십, 수 백 광년 떨어져 있고 그 사이를 채우는 것은 암흑뿐이다. 생각은 암흑을 만나면 깊어진다. 깊이에 깊이를 더하면 하나의 생각으로 모아지는데 그렇게 모아진 생각이 문득 달이 되었다.
2. 理事冥然無分別(리사명연무분별)
처음부터 달은 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깊이깊이 생각하면서 별 빛들이 연결되었고 연결된 빛 타래가 마침내 실제의 빛 덩어리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달이라고 불렀다. 달은 분명한 사실이자 현상이지만 동시에 지극히 관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테면 달은 실체이자 관념인 것이다.
달과 빛이 어우러져 달빛이 되는 순간 현상과 진리가 서로 방해함이 없이 교류하고 융합하여 일체불이一體不二가 된다. 그것은 번뇌와 보리가 다르지 않으며 현실과 이상이 둘이 아닌 것이 된다. 그 지극한 결합 위에 문득 사람의 집들이 또 다른 미혹迷惑의 실체로 드러난다.
3. 仍不雜亂隔別成(잉부잡란격별성)
지상의 빛은 허공의 빛보다 더 밝아 보인다. 하지만 두 빛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다. 각각의 생성원리에 따라 각각의 방향으로 빛나고 있다. 밤이 깊어지면 지상의 빛은 암흑 속으로 사라지고 사람들은 다시 허공의 빛을 바라보며 두 세계에 걸쳐진 자신들의 삶과 운명과 희망을 생각하며 꿈을 꾼다.
아직은 두 세계의 불빛이 꺼지지 않는 공간과 시간이 지속되고 있으며 관념의 달 위에 자리 잡은 집들이 불을 켜기 시작한다. 이렇게 서로를 향해 불 밝히는 순간, 현상의 두 세계는 서로 원융(서로 막힘이 없는 관계)하고 마침내 상즉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상즉: 모든 현상의 본질과 작용은 서로 융합하여 걸림이 없다는 의미로써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인간과 자연이 일체가 된 마음과 현상을 말한다. 보는 주관도 없고 보이는 객관도 없는 상태, 이를테면 현상계의 모든 사물이 서로 차별 없이 일체화되며, 상호개입과 상호연계 된다는 존재양식을 말한다. 마치 현상과 본질 자체가 거대한 인드라망과 같다는 것이다.
4. 法性圓融無二相(법성원융무이상)
화면 속에서는 동시에 빛나고 있지만 사실은 시간 차이를 두고 두 세계의 빛이 나타났다. 서로를 비추려면 하나의 세계는 암흑이어야 한다. 서로의 세계를 지배하는 빛이 아니라 서로를 지지해 주는 빛이 엄경근의 빛이다. 그것은 엄경근이 불빛에게 부여한 법성(모든 존재 본래의 성품)이다.
작가가 부여한 저 불빛의 법성은 서로를 위해 빛나는 것이다. 어두워지면 불 밝히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 그 빛에 반응하는 모든 존재가 서로를 지지하니 엄경근의 화면 속에서 두 빛은 곧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