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에 대한 유감
2019년 8월까지 고등학교에 근무하다가 그 해 9월에 중학교 공모교장으로 임용되어 4년을 보내고 2023년 9월 1일 다시 고등학교 교과목 교사로 돌아온 내가 2023년 하반기에 당면했던 가장 큰 부담은 바로 학생생활종합기록부(이하 생기부)에 있는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이하 ‘세특’)을 기록하는 것이었다. 중학교에서도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교장이어서 할 필요가 없었고, 4년 전 고등학교에서도 일부 과목에 한해서 필요한 학생만 기록하는 것이었는데, 2019년 11월에 발표한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방안’에 따라 2020학년도부터는 모든 과목, 모든 학생으로 확대되었다.
1. 모든 과목, 모든 학생으로 확대
2024년 올해 내가 담당하는 과목은 3학년 진로 선택, 사회과 교과군 중 ‘한국 사회의 이해’라는 과목이다. 진로 선택이라는 제한이 있는 것처럼 진로를 위한 선택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학생들이 다른 필수 교과군에 비해 인원이 적다.(217명 중 45명) 그리고 아이들이 이 과목을 선택한 배경은 과목 공부에 대한 부담을 조금 줄여보자는 의도가 일부 있다. 그런 배경에 따라 수업은 대부분 토론 수업으로 진행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모든 아이들의 특성을 파악해야만 모든 학생들의 ‘세특’을 기록할 수 있다. 이전처럼 수업 중 특별한 능력을 보이는 아이들의 ‘세특’을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수업을 듣는 모든 아이들의 ‘세특’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이를테면 수업 진행을 하면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모두 체크해야 하는데, 이것은 거의 전지적 능력이 요구된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특별한 활동을 한 일부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학생에 대한 ‘세특’은 교사가 신이 아닌 이상 정확하지 않는 사실에 기초할 수도 있다.
대입이라는 제도의 취지에 맞춰 내가 담당하는 과목을 본다면 이 과목의 대입 전형 기여도는 사실상 매우 낮다. 과목 교사로서 자존심의 문제를 떠나 아주 객관적으로 접근해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런 과목 특성에 비춰볼 때 그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아 보이는 '세특'을 모든 학생에게 빠짐없이 기록한다는 것은 교사의 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아니면 교사에게 업무를 과중하게 부담 지우려는 교육부의 다른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물론 필요한 학생도 있다. 사실 이것은 교육부 훈령이기 때문에 교육부 장관의 의도에 의해 충분히 변경될 수 있는 일이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아마 교육부 장관이 수업 장면에 단 한 번이라고 참여해 보면 모든 학생의 기록에서 다시 일부 학생의 기록으로 바뀔지도 모른다.
2. 1500바이트의 함정
1500바이트는 한글 문서 기준으로 공백 제외한 약 460자 정도의 분량이다. 모든 학생에게 460자의 글을 쓰기는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아주 적게는 100 여자 내외로 쓰기도 한다. 그러면 그 학생은 자신의 생기부를 출력해 보고 그것이 대입에 적용되던 되지 않던 왜 분량이 적은 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특히 나와 같은 진로 선택 과목은 별 다른 문의가 없지만 중요과목에서 자신의 세특 분량이 적은 경우 담당 교사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경우의 수를 없애기 위해 교사들은 아예 1500바이트를 채우려고 노력한다. 적게는 100명에서 많게는 25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의 생기부에 1500바이트, 즉 460자를 각기 다른 내용으로 쓴다는 것은 교사에게 모든 개인적인 생활을 접고 아이들 '세특'에만 올인하라는 이야기와 같다. 460자*200명=92000자, 통상 A4 기준으로 한 면을 완전히 채우는데 필요한 글자 수가 공백 제외(한글 문서 기준) 1500자로 가정하면 약 61페이지 분량이다. 61페이지는 웬만한 논문과 같은데, 문제는 그 기록이 모두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수업 중에 일어난 사실을 기초로 하여 그 61페이지가 기록된다는 것인데 현재 교사의 처우로 볼 때 이 일은 분명 각 교사들의 교육적 열정을 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교과목 교사의 부담도 크다. 하지만 담임교사는 교과목 교사보다 써야 할 항목이 더 많다. 생기부의 창의적 체험활동의 진로활동(2100바이트)으로부터 시작하여 독서활동(1500바이트), 그리고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1500바이트)까지 합치면 학생 1인당 5100바이트의 기록이 학기말에 완성되어야 한다. 글자 수로 친다면 1000자에 해당한다. 반 학생이 25명이라면 25000자를 써야 한다. 당연히 사실에 근거한 기록이어야 하며 특별할수록 대입에 도움이 된다. 하여 기를 쓰고 뭔가 특별한 활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현재 중등학교 교사에게 이런 엄청난 부담이 있다. 현장에서 담임을 기피하는 중요한 원인 중에 이 요인도 분명 있다.
3. 대입제도 공정성의 그늘
대한민국 정부와 교육부는 오랜 세월 막대한 예산과 노력을 통해 대입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그렇게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다. 핵심은 국가가 대학 신입생 선발권을 한사코 포기하지 않는 범위에서 모든 제도가 구성되었고 또 시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대학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을 것인데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한 연원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시시비비를 따질 수는 없다.
1980년에 대학입학을 한 나의 경우, 국가가 시행하는 예비고사를 치른 후 당해 대학에서 준비한 본 고사를 통해 대학에 입학했다. 그 후 대입 제도는 상전벽해를 몇 번이나 겪었는지 모른다. 지금 대입 제도 전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개별 학생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교육부 당국자나 고교 교사는 거의 극 소수의 인원일 것이다. 그만큼 복잡하다.
그 복잡함의 배경에는 공정성이라는 대 원칙이 있는데 현직 고교 교사인 나는 그 절대 원칙인 공정성을 거의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공정성이 날로 훼손되고 있음을 자주 느낀다. 정교하게 짜 놓은 대입제도의 공정성을 파고드는 세력(?)을 수시로 느낀다. 공정성이 훼손된 단적인 증거가 유행가처럼 떠도는 서울 지역 대학 순위와 서울 지역 대학과 지역 대학의 심각한 격차 등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당시(1980년) 지방에 있는 대학도 단순한 입학성적 비교(당시는 예비고사)로만 보자면 전국 10위 권 대학에 이름을 자주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지방에 있는 대학은 대부분 모집 정원의 부족을 걱정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것은 공정성이 거의 무너졌다는 이야기인데 어찌 된 일인지 교육부와 대한민국 정부는 여전히 이런 상황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4. 작은 결론
고교 교사들의 과중한 업무량, 즉 모든 학생의 '세특'을 써야 하는 문제가 대학 입시 공정성의 문제로 연결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학교 교육의 본질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한 제도적 장치 속에서 성장하는 우리 아이들이 날로 실력이 향상되고 학교 생활이 건강해지며 그 영향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쳐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이미 시작된 고교학점제는 이전에 밝힌 바(https://www.educha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99)와 같이 고교 교육의 본질을 위협하는 수준이고, 내년부터 시행될 디지털 교과서는 수많은 전문가와 학자들, 그리고 현장 교사들이 재고를 요청함에도 강행하려는 정부와 교육부를 보면서 이런 제도 시행의 본질이 아이들의 견실한 성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다. 힘을 가진 일부의 생각이 전부를 위협하는 정책은 더 이상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