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중, 고 철학 교육을 위하여
“철학을 공부하여 얻는 효용이 그저 어떤 심오한 논리학의 문제 등에 관해 어느 정도 그럴듯하게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일상생활의 중요한 문제들에 관한 생각을 개선시키지 않는다면, 그것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위험한 말들을 사용하는 여느 기자들보다 우리를 더 양심적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철학을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제자이자 친구인 ‘노먼 맬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은 정치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경제를 운용하는 사람들은 경제철학이 있어야 한다. 당연히 교육을 하는 교육철학이 있어야 한다. 정치철학이든 경제철학이든 또 교육철학이든 그 핵심은 자아성찰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엄정한 비판과 분석의 기준은 자신이 타인에게 요구하는 그 정도의 수준이면 충분하고, 좀 더 자신에게 엄격할수록 위대해진다.
지금 이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의 최상층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자아성찰이 없다. 단정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단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현상과 사실들이 너무나 많다. 바꿔 말하면 이 나라 최상층, 즉 권력집단 은 자신의 분야는 물론이고 삶에 대한 최소한의 철학도 없다는 이야기다. 그들에게 철학의 부재는 우리 사회 곳곳에 이상 징후를 양산해 내고 그 이상 징후들은 각종 부작용으로 나타난다. 그 부작용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 권력 작용 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권력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이 왜 철학을 가지지 못했을까를 깊이 생각해 본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들에게 이미 철학의 필요성, 즉 자아성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 자아성찰이 필요한 것은 자신과 타인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과 세상의 관계에서 수평과 균형을 유지하려는 인간 오성悟性의 위대함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들에게는 인간 오성이 필요 없거나 혹은 폐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인간 오성의 폐기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일지도 모른다.
지금 권력의 핵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대단히 명석하여 촉망받고 화려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사회로부터 기대와 선망의 존재들이었다. 자신의 명석함과 주위의 기대와 관심은 인간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점차 그들을 자만과 오만에 빠지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인 이들은 학창 시절 철학교육을 받은 적도 당연히 없다. 따라서 오만함은 그나마 있었던 성찰과 배려를 완전히 폐기하게 만들었다. 폐기해도 아무런 문제나 저항이 없는 사회에 편입된 그들은, 인간에게 부여된 최소한의 도덕적 감수성이 둔감해졌고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회복의 의지조차 상실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것을 심화시키는 것은 그들이 속한 권력 집단의 야만성에 큰 원인이 있다.
야만성은 非문명, 후진後進문명의 징표다. 정치, 경제, 교육의 상층부에 있는 권력집단이 비문명, 또는 후진적이라는 말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지만, 후진성의 핵심 판단 기준은 도덕률의 부재다. 이를테면 문명사회에서 도덕률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배려’다. 성찰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모든 도덕률이고, 배려는 타인에게 향하는 모든 도덕률이다. 그런데 현재 이 나라의 권력 상층부는 아마도 오래전에 성찰과 배려를 폐기했으니 당연히 후진적이고 그것이 심화되어 마침내 야만적 상황에 이른 것이다. 외형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지만 내면은 이미 야만의 존재, 즉 야수 그 자체다.
야만이나 야수의 특징은 이를테면 ‘자기만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가리지 않는 잔인함과 포악함’이다. 예를 들어 사자들이 사냥하는 장면을 잠시라도 보면 그 포악함과 잔인함, 즉, 야수성에 치를 떤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탐욕스럽게 물고 뜯고 찢는 것이 야수들이다. 마찬가지로 인간 야수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들을 향해서는 항상 이빨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 야수들이 지금의 권력층들이다. 사자와 다른 점은 사자들은 배고플 때만 잔인해지고 포악해지는 반면 인간 야수들은 항상 탐욕의 상태를 유지한다.
야수들도 가끔 제휴하기도 한다. 먹이가 부족하면 사자와 하이에나가 썩은 고기라도 같이 먹는다. 그 제휴와 연대의 대상은 그들 서로이지 초식동물들이 대상은 아니다. 서로 제휴하는 목적은 참을 수 없는 욕망(허기)일 뿐, 언제든 표변하여 서로를 공격하게 된다.
이러한 야수들에게 도덕률을 회복하라는 것은 무리다. 그들은 이미 도덕률을 잃었고 다시 회복할 마음도 없으니 그들에게 자신의 성찰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차라리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상황으로 가지 못하도록 그나마 아직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배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힘써 교육하고 동시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 바로 철학 교육이 필요해지는 지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