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준식 Nov 10. 2024

엄경근을 추모하며

문득 無로 돌아간 엄경근을 추모하며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다. 그 던져진 순간부터 우리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고민한다. 그리고 처음 던져진 것처럼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삶은 거두어지고 만다.


삶과 죽음은 사실 늘 한결같았다. 그러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은 오로지 삶을 살고 있는 우리뿐이다. 실낱처럼 이어지는 그런 삶 속에서 기뻐하고 슬퍼하며 그렇게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때론 영원할 것처럼, 때론 죽음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함부로 삶을 살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늘 마지막은 불현듯 찾아오는 손님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엄경근을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이다. 그의 그림을 통해 나는 그를 보았고 생각했으며 그와 공명했다. 하지만 그게 다였던 모양이다. 물론 그림 속에서 그가 쓰는 색채와 그가 조성해 놓은 삶의 구조를 보기는 했지만 나는 정확하게 그를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에 대한 나의 글은 아마도 십 수 편이 넘는다. 그의 그림에서 나는, 그의 어두운 과거와 조우했지만 이미 아름다운 풍경으로 변한 것에 그저 안도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어둠이 이제 그를 삼켰다. 


루살카를 보면서 그리고 최근 섬 그림을 보면서 그의 영혼이 외로울 것이라고 추론했지만 그의 외로움을 같이 이야기하기에는 엄경근과 나 사이에는 20년의 세월의 벽이 있었다. 내가 더 마음을 기울였어야 했다. 후회가 되지만 이미 그는 떠났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제 하루, 오늘까지 울컥울컥 슬픔과 분노가 동시에 올라온다. 이유는 천 가지 만 가지다.


이제 그는 無로 돌아갔다. 하지만 남은 자들은 그를 잊기 위해, 혹은 그를 기억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가 남겨 놓은 관계와 그 관계에 묶인 사람들은 그 관계 때문에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고 혹은 머리를 흔들며 애써 잊으려 할 것이다. 43년을 이 땅에 살아온 한 존재의 소멸이 주는 이 지독한 단절의 고통을 우리는 감내하여야 한다. 산 자의 몫이다. 


나는 더 이상 그의 그림을 평하지 못하고 나는 더 이상 그의 새 그림을 보지 못하며 나는 더 이상 그의 그림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내 방에 걸린 그의 그림을 어제저녁 모두 내려서 방 한편에 돌려놓았다. 당분간 그의 그림을 보지 않으려 한다. 이 지독한 슬픔과 분노가 수그러들 때까지……


잘 가시라! 엄경근. 절대로 그럴 리 없겠지만 다시는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마시라. 

무로 돌아간 엄경근을 추모하며 김준식 쓰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