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6)
C. 『Either/Or』(‘둘 중 하나’, 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등으로 번역)
키르케고르가 1843년 Victor Eremita(승리하는 은둔자)라는 가명으로 『Either/Or』(둘 중 하나, 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등으로 번역)를 출판한다. 이 책은 키르케고르가 가명을 사용하여 출판한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에는 ‘Victor Eremita’ 외에도 ‘A’, 와 ‘B’ 즉 ‘Judge Vilhelm’(빌헬름 판사, Wihelm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또는 William으로도 표기), ‘Johannes’ 등 여러 명이 등장한다.
이 책의 제1부는 심미적인 인생관을 대표하는 ‘A’라는 사람이 쓴 일곱 개의 논문과 ‘A’가 우연히 입수한 것으로 되어 있는 『유혹자의 일기』를 합쳐서 수록한 것이고, 제2부는 ‘B’라는 사람이 쓴 편지의 형식으로 된 두 개의 논문과 ‘B’의 친구인 어떤 목사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다. ‘B’는 법관으로서 윤리적인 인생관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Diapsalmata(디압살마타, 시적 표현으로서의 후렴구)에서 각 주제별로 짧게(시詩적 표현으로) 격언, 에피그램[1], 일화 및 묵상들로 되어 있다. ‘자기 자신에게’라는 부제를 달아 놓음으로써 글이 향하는 방향을 분명하게 한다. 전체적으로 냉소적이며 비관적인 인간관에 기초한 이야기들이 많다.
맨 처음 ‘시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詩人이란 어떤 인간인가? 마음속에는 깊은 고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입술이 그렇게 생겨서인지, 탄식과 비명이 입술을 빠져나올 때는 아름다운 음악으로 들리는 불행한 사람이다.”[2] 시인에 대한 비난은 아니지만 찬양이라고도 볼 수 없다.
이런 문체는 키르케고르의 특징인데 그가 여러 가명으로 책을 출판하였지만 독자들은 금방 그가 쓴 책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그의 글은 독특했다.
키르케고르의 장기인 극단적인 논리적 점층도 볼 수 있다.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말을 타고 싶지가 않다. 왜냐하면 승마란 지나치게 과격한 운동이니까. 나는 걷고 싶지가 않다. 왜냐하면 걷는다는 것은 힘이 드는 일이니까. 나는 누워 있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나는 누워 있는 채로 있던가 다시 일어나야만 하는데, 나는 그 어느 쪽도 하기가 싫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3]그와 마주하고 있는 현상을 대단히 주관적으로 편집하여 그가 말하고자 하는 사실을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변증적 논리로 글을 읽는 독자를 오히려 궁지로 몰아간다. 권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서운 것은 권태다 - 무서운 권태여! 나는 이보다 더 강한 표현을 모른다. 이보다 더 진실한 표현을 모른다. 왜냐하면 유사한 것은 오로지 유사한 것에 의해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4]자신의 생각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글을 읽는 독자에게 어떤 이견異見의 공간조차도 없애버린다.
결혼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논리적 자유를 은근히 제한한다. 이를테면 이런 글도 있다. “결혼을 하라. 그러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지 말라. 그래도 역시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결혼을 하든 않든 간에,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보고 웃어라. 그러면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보고 울라. 그래도 역시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 세상의 어리석은 일을 보고 웃든 울든 간에, 그대는 후회할 것이다.[5]
죽음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생각도 곳곳에 보인다.
“인생이란 얼마나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일까! 우리들은 한 사람의 인간을 매장한다. 우리는 무덤에까지 그를 따라가서, 그에게 세 삽의 흙을 뿌린다. 우리는 묘지까지 삯마차를 타고 갔다가, 다시 삯마차로 집에 돌아온다. 그러고는 우리는 우리들 앞에는 아직도 긴 인생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며 자위한다. 십 년을 일곱 번 곱한다고 해도 무엇이 그리 오래인가! 어째서 우리들은 그것을 단숨에 끝내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들은 그와 함께 무덤에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머무르지 못하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들은 마지막 사자死者에게 마지막 세 삽의 흙을 뿌리는 마지막의 불행한 인간으로 누가 뽑히느냐를 보기 위해서 제비를 뽑지 못하는가? 언제나 키르케고르를 따라다니던 죽음의 그림자[6]를 그는 이렇게 묘사한 것이다.
욕망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언제나 암울한 비난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곤충 중에는 암놈에게 수태를 시키고 난 순간에 죽어버리는 것들이 있다. 기쁨이란 모두가 그런 것이다. 최고이고 최대라고 할 수 있는 인생의 향락의 순간은 죽음을 동반하고 있다.”[7]
[1] 에피그램(Epigram): 간결하고 흥미로우며 동시에 기억에 남는, 그리고 풍자적인 진술을 의미한다. 그리스어 ‘epígramma’ 즉 ‘비문碑文’을 뜻하는 말로써 ‘쓰다’, ‘새기다’의 의미가 있다.
[2]『Either/Or』,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15. 35쪽.
[3] 앞의 책. 36쪽
[4] 앞의 책. 52쪽
[5] 앞의 책. 55쪽
[6] 42세로 죽기 전까지 키르케고르는 늘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았다. 1838년, 키르케고르가 25세 되던 해에 아버지(미카엘 키르케고르)가 죽자 그는 자신이 아버지보다 먼저 죽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워한다. 그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가 지은 죄가 너무 커서 그의 일곱 자녀(성서에서 ‘7’의 의미를 대입하여)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대부분의 형제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도 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언제나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7]앞의 책. 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