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키르케고르의 핵심 개념
B. 절망(1)
키르케고르가 1849년 역시 그의 또 다른 필명인 Anti-Climacus(반 클리마쿠스 또는 사다리를 오르는 클리마쿠스)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죽음에 이르는 병』(The Sickness unto Death)에서 '절망(despair)'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이 책은 기독교적 실존철학의 대표작이다.
“인간은 정신精神이다. 그러나 정신이란 무엇일까? 정신이란 자기自己다. 그러나 자기는 무엇일까? 자기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관계, 바꿔 말한다면 그 관계에 있어서 그 관계가 자기 자신에 관계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는 관계가 아니고, 관계가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관계다. 인간이란 하나의 유한과 무한의 종합綜合,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종합, 자유와 필연의 종합, 요컨대 하나의 종합이다. 종합이란 두 개의 것 사이의 관계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이른바 인간이란 아직 자기는 아니다.”[1]
억지로 풀이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정신은 곧 자기自己인데 자기는 관계이다. 그런데 그 관계라는 것이 자신과의 관계다. 즉 물질적 존재인 자신과 그 상대편에 존재하는 비 물질적 자신과의 상호작용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을 묶은 것이 자기인데, 인간의 정신이 관계이자 동시에 자기라는 앞의 설정은 오류가 된다. 이것을 기초하여 말한다면 인간이란 물질적 존재(외부적으로 식별 가능한, 이른바 육신)와 비물질적 존재(오직 스스로에게만 식별되는, 육신의 반대인 영혼)의 관계를 말한다. 영혼은 무한하고 육신은 유한하다. 따라서 인간은 이 둘의 종합이다. 이때 물질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고 말하는 순간(유한한 쪽만 이야기하기 때문) 인간은 관계로서의 자기는 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여기에 키르케고르는 다시 ‘자기’에 대해 이런 정의를 첨가한다. 매우 어려워 보이지만 앞의 자기에 대한 의미를 그의 방법대로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기는 무한성과 유한성으로 형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종합은 하나의 관계이고, 또 비록 그것이 파생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하는 관계이고,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에게 관계한다는 것이 곧 자유라고 할 것이다. 자기란 곧 자유다. 그러나 자유는 가능성과 필연성이란 두 개의 규정 속에 들어 있는 변증법적인 요소인 것이다.”[2]
여기서 외부적으로 식별 가능한 육신은 시간성에 의존하고 동시에 필연이 지배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대로 오직 스스로에게만 식별되는 영혼은 시간성과는 무관하여 영원한 것이며 동시에 언제나 가능태(Potentiality가능성)로 존재한다.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의 서문에서 성경 요한복음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아니한다’(요한복음 11장 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사로는 죽었다. 그리스도께서 후에 다시 덧붙여서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깨우러 가노라’(11장 11절)고 한 말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을 때(제자들은 그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나사로는 죽었느니라’(11장 14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리하여 나사로는 죽었으나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즉, 그는 죽었지만 이 병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3]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진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는 것이다.
절망의 세 가지 종류를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표현했다. “첫 번째 절망하여 자기自己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본래적인 것이 아닌 절망), 두 번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세 번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4]
- 절망하여 자기自己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
즉, 자신이 자기를, 그것도 영원한 자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관한 절망적인 무지.[5]를 말한다. 이 경우 절망은 진정한 절망이 아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무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단순한 절망이다.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만약 인간의 자기가 자기 자신을 설정한 것이라면(절대로 그럴 수 없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자기 자신에게서 빠져나가려고 하는) 이야기는 불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설정한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전제 조건의 오류이기 때문이다.[6]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 제 딴에는 자기의 절망을 의식하고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 일어난 절망을 있는 힘을 다하여 자기 혼자의 힘으로 제거하려고 한다면, 그렇다면 그 과정 역시 절망 속에 있는 것이고, 그가 비록 자기의 온갖 노력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더 깊이, 그는 보다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다.
즉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자신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그것이 바로 절망의 증거이다.
-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키르케고르는 이것을 단적으로 반성[7]이라고 표현한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한한 자기’에 관한 의식(이를 테면 성찰이나 반성, 혹은 통찰에 가까운 행위)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 ‘무한한 자기’란 사실 자기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또는 추상적 가능성)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는 자기를 설정한 힘에 대한 모든 관계로부터 자기를 떼어 놓으려고 하거나, 혹은 그런 힘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관념으로부터 자기를 떼어 놓으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구체적인 자기 속에 자신이 가지고 싶은 것과 자신이 가지고 싶지 않은 것을 결정하여, 자기 자신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자기로 만들기 위하여, 이 무한한 형태의 도움을 받아 자기는 자기 자신을 절망적으로 처리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자기를 창조하려고 한다.[8]
조금 복잡하다.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를 쉬운 말로 ‘절망에 처한 사람’이라고 가정하자.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자신 만이 절망에 빠져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으로 또 다른 절망에 빠질 수도 있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절망한다는 그것은 인간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종합(앞서 이야기 한 무한과 유한의)이 아니었더라면, 인간은 결코 절망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또 그 종합이 애당초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온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었더라면, 인간은 역시 절망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9]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절망은 “자신이 진정한 자신의 자아가 되려는 의지의 반대 편에 있으며 그것이 곧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라고 말한다. 절망은 육체적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죽음을 갈망하게 된다. 우리가 잘 아는 햄릿의 절망[10]이 이와 유사하다.
자신의 행동이나 태도를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햄릿이 궁으로 배우들을 불러들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배우가 연극을 통해 자신의 말을 대신하게 한다. 그중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바로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11]
[1]『죽음에 이르는 병』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15. 24쪽
[2] 앞의 책. 46쪽
[3] 앞의 책. 17쪽
[4] 앞의 책. 24쪽
[5] 앞의 책. 61쪽
[6] 앞의 책. 25쪽
[7] 앞의 책. 88쪽
[8] 앞의 책. 89쪽
[9] 앞의 책. 27쪽
[10]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가 1599년에서 1601년 사이에 쓴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 덴마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햄릿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클라우디우스 왕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이다. 4대 비극은 <햄릿>, <리어왕>, <오셀로>, <맥베스>이다.
[11] 햄릿 3막 1장, 햄릿과 오필리어가 만나기 직전, 클로디어스와 폴로니어스가 숨어서 햄릿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 햄릿이 자신의 고뇌를 토로하는 장면인데 무대에 오필리어가 있는 것을 의식한 햄릿의 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