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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Dec 11. 2024

키르케고르 (9)

키르케고르 9


1. 심미적 실존 방식(The Aesthetic Sphere)


2. 윤리적 실존 방식(The ethical Sphere) 


‘권태’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태도는 앞서 본 바와 같다. 즉 쾌락의 끝은 언제나 권태롭다는 것인데 여기에 또 다른 문제를 개입시킨다. 바로 ‘자유’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단순히 ‘제한이 없는 상태’ 정도의 의미이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우리 삶은 제한투성이다. 즉 제한에는 거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 제한의 다른 이름은 ‘역할’이다. 직업적인 역할, 가정 내에서의 역할, 심지어 자신이 가진 성격 소유자로서의 역할조차 있다. 그리고 각각의 역할에 맞는 전형적인 행동이 따라야 한다. 이 모두가 강력한 제한이다. 


이 강력한 제한인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자아’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 그런데 약간의 혼선이 생겨난다. 본래 역할이라는 것은 외부세계로부터 자신의 자아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마련한 강력한 보호장구인데, 너무 역할에 얽매이다 보니 이제는 역으로 이 보호장구가 내부의 자아를 흡수하거나 잠식蠶食[1]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즉 어떤 역할이 자신의 자아를 나타내는 역할인지 조차도 모르는 단계가 된 것이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여기서 하나의 대안 혹은 편법을 이야기한다. 만약 이 자아가 실제로는 양파처럼 끝없이 나타나는 것이라면? 마지막까지 벗겨도 계속 똑같은 껍질이 나올 뿐, 핵심을 발견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그런 상황에서 자아에 맞는 역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런 상황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Either/Or』에서 화자인 ‘A’(심미주의자)를 내세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역할을 은밀히 오가며(이를 테면 양파의 껍질 사이를 옮겨 다니며 각각의 껍질이 진정한 자신의 ‘자아’인 것처럼) 생활한다면 자유를 얻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2]



『Either/Or』에서 심미주의자 ‘A’의 이런 주장 속에는 각 껍질 사이를 오가는 자아의 ‘예측 불가능성’을 자유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동시에 같은 책에 등장하는 윤리주의자 ‘빌헬름 판사’의 입을 빌려 심미주의자 ‘A’의 논리를 공격한다. “자유를 찾으려 하면서 정작 자유로부터 도망치고 있다”[3]고 말한다예측 불가능성을 우리는 자유라고 부르지는 않는다만약 자유와 예측 불가능성을 동일시한다면 빌헬름 판사의 말처럼 자유라고 생각하는 순간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기 때문에 자유를 찾으려고 하는 순간 이미 자유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성에 다가갈 뿐이다


만약 심미주의자의 말처럼 만약 그가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자아를 옮겨 다닌다면 그의 자아는 분열되지 않을까? 자신의 현재 자아와 역할이 일치하는 경우는 과연 있기나 할 것인가? 특정 역할을 하는 순간, 타인은 그 특정 역할을 하는 그 상황에 집중하게 될 것이고(그것을 바탕으로 관계가 형성될 것이고) 자신 또한 그 역할에 맞추게 될 것인데 그런 상황을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이 거울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보고, “나는 곧 나 자신을 알아보았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미친 소리가 되듯이, 이 상황 역시 그런 뜻에서 광적이라 하겠다.”

[4]물론 언제나 심미(쾌락)를 추구하는 심미주의자의 자아는 어쩌면 평범한 사람의 자아보다는 복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분명 한계가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빌헬름’ 판사는 다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그대가 말하기를 인생은 가장무도회이기 때문에 마르지 않는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대가 타인에게 드러낸 모습(다중 역할을 하고 있는)은 어쩌면 모두가 환상에 가깝다. 따라서 그 누구도 그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지금 그대는 그대의 은신처(다중 역할 속에서)를 지키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데, 그 일은 일단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그대의 가면은 때로 수수께끼처럼 모호하지만 단지 모호할 뿐, 사실 그대는 그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의 존재는 오직 타자와의 관계 속에만 존재하며, 그 관계에 의해서만 그대로써 존재할 뿐이다.”[5]


자신의 ‘역할’을 양파처럼 다중화한다고 해서 각각의 역할이 언제나 각각의 자아와 일치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역할은 타인에게 드러난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는 순간 스스로 그 역할에 상응하는 자아를 일치시켜야 하는 순간 정작 자신은 다른 자아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자신이 곧 자신의 역할이자 곧 자아이므로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그리고 자아를 다양화한다면 각각의 역할과 자아는 더욱 복잡해질 뿐, 그 어떤 의미도 없다.(빌헬름 판사의 말처럼) 이를테면 자신의 역할에 부합하는 진정한 ‘자아’(존재하기만 한다면)에는 충실하기 어렵다. 오히려 스스로 역할과 자아의 혼란에 빠져 진정한 자아도 역할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진정한 자아를 확인하고 인식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해 키르케고르는 “자신을 선택하라”라고 말한다.[6]즉 여러 개의 역할과 그 역할에 따른 자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된다고 말한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설명한 절망[7]에 빠져 이것인가또는 저것인가’ 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아마도 이 절망은키르케고르의 분류에 따른다면 절망에 빠져 자기 자신 이려고 하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욕망(즉 심미적 자아가 가진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까지의 자아를 완전히 소멸시켜 진정한 자아를 찾겠다는 열망과 의지가 나타날 때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그 지점에 이르게 되면 인간들은 최후의 방법으로 도약[8]을 시도한다도약을 시도하거나 또는 시도해 본 심미주의자들은 마침내 태어나서 처음으로 쾌락(자아도취적인)이 아니라 다른 관점으로 스스로를 관찰하고 판단하게 된다.[9]


심미주의자들은 이 도약을 통해 어떤 특별한 지점을 통과해야만 ‘윤리적 실존’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 있는데 그 특별한 지점은 심미적 실존에 매우 근접한 특정 지점에서 도약을 통해 획득한 윤리적 결정이 윤리적 실존으로 넘어오는 결정적 열쇠가 된다. 일단 윤리적 실존으로 넘어온 이후에는 그 최초의 윤리적 결정을 확장시키며 새로운 자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물론 제한점도 당연히 있다. 단지 추상적으로 새로움을 선택했다는 것 만으로는 윤리적 실존이라고 말할 수 없다. 윤리적 실존의 핵심은 매우 현실적인 헌신이나 약속이 유지되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키르케고르는 이 헌신의 대상을 매우 다양하게 인정한다. [10]


다만 키르케고르는 이 헌신에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첫 번째 조건은 자기완성을 위한 노력과 그다음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이었다.[11]


도약을 통해 근본적인(윤리적인) 선택(즉 자신을 선택)하였다면 앞서 다양한 역할에 따른 다양한 자아의 분열(양파 껍질을 옮겨 다니는)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여러 역할을 담당한다 하더라도 각각의 역할에서 자신의 도덕적 헌신이 개입되어 일관성 있는 자아가 유지된다. 마침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한 자아는 이 도덕적 헌신과 양립할 수 없게 되어 그 조건에 맞지 않는 다른 역할들은 자연스럽게 폐기되는 것이다.   


윤리적 실존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위해 우리는 선택의 단계를 반드시 넘어야 한다. 즉 자신의 선택으로 무엇을 얻을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빌헬름 판사는 선택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 선택 그 자체가 인격을 채우는 데 결정적이다. 선택을 하면 인격은 그 선택의 내용에 몰두할 수 있지만 선택하지 않으면 인격은 시들어 소멸하고 만다." [12]


선택을 통해 인격을 채운다는 것은 모든 선택의 경우에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도덕이며 그 도덕은 자신이 정해 놓은 선택의 내용(이를 테면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종교적 도덕을 선택했다면 모든 행동의 기준에 종교적 도덕이 개입되어야 하며 더불어 자신의 행동과 양심이 언제나 그 상황과 신념에 일치하는지에 대한 자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문에 충실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택은 무의미해지고 동시에 선택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갈 위험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1] 갉아먹음




[2]『키르케고르 실존극장』 도널드 파머, 정영은 옮김, 필로소픽, 2024. 104쪽 




[3] 앞의 책. 104쪽




[4] 『Either/Or』(2부)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15. 55쪽.




[5] 『키르케고르 실존극장』 도널드 파머, 정영은 옮김, 필로소픽, 2024. 105쪽




[6] 앞의 책. 107쪽




[7] 절망의 세 가지 종류를 키르케고르는 이렇게 표현했다. “첫 번째 절망하여 자기自己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본래적인 것이 아닌 절망), 두 번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지 않는 경우, 세 번째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려고 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8] “누군가가 도약하려면 반드시 혼자 해야 하며 또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올바르게 이해한 채 혼자 있어야 합니다. 도약은 결정입니다.” 철학적 단편에 대한 비과학적 후기』 요하네스 클리마쿠스 지음(쇠렌 키에르케고르 편집) Howard V. Hong and Edna H. Hong (1992) Princeton University Press. 102쪽




[9] 이렇게 뭔가를 판단해야 한다는 이유로 키르케고르는 ‘윤리적 실존’에 대한 대변자로 판사라는 직업을 부여하였다. 




[10] 사실 키르케고르는 매우 독실한 기독교도로서 헌신했지만 그는 의외로 칸트주의, 공리주의 등의 철학적 신념에서부터 불교,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인본주의 등도 그 헌신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11] 『키르케고르 실존극장』 도널드 파머, 정영은 옮김, 필로소픽, 2024. 110쪽




[12] 『Either/Or』(2부)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역, 다산글방, 2015.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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