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10)
1. 심미적 실존 방식(The Aesthetic Sphere)
2. 윤리적 실존 방식(The ethical Sphere)
3. 종교적 실존 방식(The Religious Sphere)
앞서 우리가 본 것처럼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윤리적 실존 방식은 너무 가혹하다. 모든 행동에 자신이 선택한 도덕의 기준이 개입되어야 하며 더불어 자신의 행동과 양심이 언제나 그 상황과 신념에 일치하는지에 대한 자문과 성찰이 끝없이 이어져야 한다.
그 끝없는 자문 끝에 도달하는 곳은 언제나 윤리적인 ‘유죄’ 아니면 ‘무죄’다. 두 개의 결과만 존재한다. 거의 필연적이다. 하지만 무죄라고 해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신념에 일치되도록 하는 반성과 행동이 뒤따라야만 한다. 따라서 그 어떤, 그리고 작은 유예도 허용되지 않는 가혹한 공간이 바로 키르케고르가 상정한 윤리적 실존 공간인 것이다. 이렇게 가혹한 조건을 만들어 낸 키르케고르의 의도는 사실 ‘종교적 실존’으로 새로운 도약을 넌지시 권하기 위한 사전 설계였을 수도 있다.
사실 키르케고르 자신도 거의 윤리적 실존에 머무르지 못했다. 그는 약혼녀(레기네 올센)와 불 특정한 이유로 파혼을 고지하고[1]윤리적 실존에 대한 대부분이 설명되어 있는 『Either/Or』(이것이냐 저것이냐)는 자신의 비윤리성을 반성하기라도 하듯 모든 것이 차단된 엄격한 수도원에서 집필되어 키르케고르 스스로 윤리적 실존과는 거리가 상당 부분 있었음을 자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적 실존 공간이 윤리적 실존 공간보다 더 평화롭고 자유로운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종교적 실존 공간 또한 윤리적 실존에 맞먹을 만큼 매우 건조하고 동시에 엄격하며 때론 거칠다.
종교적 실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Fear and Trembling』(두려움과 떨림)은 구약성경의 ‘아브라함’과 ‘이삭’이 주인공이다. 일반적인 신앙인이나 일반적인 아버지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핵심 주제다. 매우 비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세계를 통해 종교적 실존 또한 쉽지 않은 세계임을 보여준다.
1843년 키르케고르의 또 다른 가명인 Johannes de silentio (침묵의 요한)로 발표된 『Fear and Trembling』의 책 제목은 빌립보서 2장 12절[2]의 내용인 ‘두렵고 떨리는’을 차용하였다. 하지만 핵심 내용은 창세기 11장에서 22장 사이의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의 세습 족장이었다. 그는 이복동생인 사라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녀는 결혼 당시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일흔다섯이 되던 해(창세기 12:4), 여호와는 그에게 민족을 이끌고 자신이 보여 준 약속의 땅, 즉 가나안으로 가라고 명한다. 어느 날 여호와는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 약속했고(창세기 12:7), 그 아들이 강대한 나라의 아버지가 되리라고 언약했다. 수년이 지났지만 사라는 임신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아브라함이 아흔아홉이 되고 사라가 아흔이 되던 해 여호와가 나타나 다시 같은 약속을 했다. 너는 아들의 아버지가 되리라.(창세기 17:19~18:15)
몇 년 후 사라는 이삭을 낳았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와 약속한 대로 이삭에게 할례를 행했고, 젖을 떼는 날 큰 잔치를 열었다.(창세기 21:8) 그리고 창세기 22장 1절~2절에 나오는 무서운 밤[3]이 찾아온다. 한밤중 잠에서 깬 아브라함의 귀에 여호와의 음성이 들린다.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망설임 없이 이삭과 함께 길을 떠났다. 황량한 모리아 사막을 가로질러 사흘을 여행한 끝에 목적지에 다다랐고, 아브라함은 여호와가 말한 제단 위에 이삭을 눕혔다. 칼을 높이 들어 이삭을 찌르려는 순간, (창세기 22: 9~10) 여호와가 나타났다. 여호와는 이삭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막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자신의 시험을 통과했다고 말했고, 마침 근처에 있는 수풀에 뿔이 걸려 꼼짝 못 하고 있던 양을 잡아다가 대신 바치라고 했다. 아브라함은 결국 이삭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마을로 돌아가 평생을 축복 속에 살았다.(창세기 22:19)
키르케고르에게 이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는 『Fear and Trembling』에서 이렇게 썼다.
“아브라함의 팔에 힘을 준 자(이삭을 죽이려는 구 순간)는 누구였을까? 들어 올린 그의 오른손이 힘없이 내려지지 않도록 이를 지탱한 자는 누구였을까? 이 광경을 눈앞에서 보는 자는 놀라서 전신이 마비될 것이다. 아브라함의 마음에 힘을 불어넣어 주고, 이삭도 어린양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눈이 흐려지지 않도록 한 자는 누구일까?”[4]
자식을 죽인 다음 태워서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해 장작을 끌어 모으고 그 위에 자식을 묶어 마침내 칼을 들어 자식의 심장을 노려보는 아브라함의 모습, 이 장면만 놓고 본다면 뭔가에 사로잡혀 또는 뭔가에 짓눌려 자식을 죽이는 부도덕하고 흉악한 범죄자, 혹은 정신이상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에 키르케고르는 책 제목처럼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 잡힌 것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이 상황을 두고 키르케고르는 오래 고민하였다. 그리고 키르케고르는 앞서 그가 말한 불안[5]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을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는 하다.)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무한한 체념[6]의 운동’ 과 ‘믿음의 운동’ 이 동시에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무한한 체념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포기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요소이고, 믿음의 운동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통해 이삭을 되찾게 만드는 긍정적 요소이다. 그런데 무한한 체념이나 믿음의 운동은 사실 하나의 행동 안에 들어있어서 매우 역설적인 상황이다. 이러한 역설을 그나마 인정할 수 있는 영역이 종교일 것이므로 우리는 이것을 종교적 역설로 보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 즉 살아 있는, 그것도 정말 어렵게 얻은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 번제[7]를 올려야 하는 아브라함의 이 기막힌 상황을 키르케고르는 ‘무한한 체념의 기사’[8]로 표현했다.
아브라함의 처지를 보자. 그는 여호와의 계시(명령)에 따라 그가 가진 사회적 권리와 책임, 가족으로서의 의무와 사랑 모두를 내려놓고 모리아로 향한다. 아내인 사라를 남겨둔 채 이삭을 데리고 사막으로 떠난 순간 아브라함은 이삭과 사라뿐 아니라 자신의 과거, 미래, 심지어 자아까지도 놓은 상태다.[9]
마침내 아브라함은 이러한 모든 상실에 무한히 체념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키르케고르가 ‘실존’이라는 개념에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무한한 체념에 이른 후(즉 모든 것을 잃은 후) 믿음을 통해 자아를 확인하는 것이 바로 실존의 영역인 것이다. 하지만 무한한 체념이 무조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오히려 평화와 안식이 있다.
“이 무한한 체념은 오랜 민간전설에 나타나는 저 저고리와도 같다. 눈물을 흘리며 실을 뽑아내고, 눈물로써 그 실은 표백되고, 저고리는 눈물 속에서 지어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저고리는 쇠나 강철보다도 더 몸을 잘 보호해 주는 것이다.”[10]
이 말속에 있는 저고리가 바로 자아다. 자아는 고통(눈물, 표백, 다시 눈물) 속에서 성장한다. 그리하여 자아는 강해진다. 그 강해진 자아가 이전의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옮겨갈 수 있는 도약의 계기를 제공한다. 눈물로 표백된 고귀하고 존엄한 자아를 향해 다시 한번 더 도약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심미적 실존에서 윤리적 실존의 도약보다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의 도약은 이전의 도약에 비해 더 두렵다. 이전의 도약은 쾌락에 찌든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위한 것이었다면 윤리적 실존에서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가는 도약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등지는 도약(아브라함의 행동처럼) 일 수 있는 것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누 14:26)
성경에서 예수의 제자가 되는 길을 기록해 놓은 누가복음서의 구절이다. 아브라함의 행동이 성경의 이 말씀으로 언뜻 이해되기도 하지만 보통의 우리, 그리고 키르케고르에게 조차도 이해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Fear and Trembling』이라는 책을 썼을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서 성경의 이 구절을 떠 올린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행동은 모든 보편을 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11]
보편의 시각으로는 일상적인 윤리, 아버지로서의 윤리나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아브라함의 행동이다. 이 상황을 키르케고르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12] 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윤리적 정지 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일반화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동시에 어리석은 일이다. 도대체 자식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자식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바탕은 무엇일까? 키르케고르는 그것을 부조리의 힘[13]으로 생각했다.
키르케고르에게 아브라함은 이해 불가능한 경지였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을 살인자[14]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마침내 아브라함을 이해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돌린다. 지금까지 모든 것을 잃을 가능성에 놓여있었던 ‘무한한 체념의 기사’였던 아브라함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모든 것을 얻는 ‘믿음의 기사’인 아브라함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여호와의 관계를 다시 돌아본다.
“시간적인 것 전체를 부조리한 힘을 빌려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고 겸손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의 용기’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단념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얻었다.”
즉 믿음을 통해 오히려 이삭을 단념한 것이 아니라 이삭을 얻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반드시 여호와께서 자신의 일을 멈춰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이 상황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윤리적 자아의 단계에서는 불가능하고 그 자아를 완전히 버리고 전혀 새로운 자아를 얻은(즉 종교적 실존 상태) 이후에 가능한 것이다.
하여 키르케고르는 『Fear and Trembling』 2. 아브라함의 찬사에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느님을 믿은 자는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했다. 어떤 자는 그의 힘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그의 지혜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그의 소망 때문에 위대했고, 어떤 자는 그의 사랑 때문에 위대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했다. 무력無力이 본질인 그의 힘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 어리석음이 그 비밀의 본질인 지혜로 말미암아 그는 위대했다. 광기狂氣의 모습을 빌린 그의 소망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한 사랑 때문에 그는 위대했다.”[15]
[1] 키르케고르는 그 이유를 “신께서 결혼을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했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마음에 도사린 우울이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20대의 키르케고르의 마음을 점령하고 있던 것은 우수憂愁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레기네를 사랑하기 시작하자, 사랑의 정념情念이 일시적이나마 이 우수를 극복한 것 같았다. 1840년 9월, 드디어 키르케고르는 자기의 결심을 고백했다. 레기네는 돌같이 굳은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기만 하고 한 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수의 안개도 이 찬란한 현실 앞에서는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그는 그날의 일을 그의 일기에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그는 레기네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국 결실을 맺지 못했다. 1841년 10월에 키르케고르는 레기네와의 약혼을 파기하게 되었다.” 그가 레기네와의 약혼을 파기한 이유를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종교적 인간이다. 그런데 레기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라는 말은 『죄가 있느냐, 없느냐』의 거의 매 페이지마다, 때로는 한 페이지에도 여러 번 나온다. 키르케고르는 레기네와 자기를 대비하여 다섯 개의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1) 나는 자기 속에 죽치고 있다. 그러나 그 여자는 자기 자신 속에 죽치고 들어가 있을 수가 없다. 2) 나는 우울하다. 그 여자는 쾌활하다. 3) 나는 본질적으로 사색가다. 그 여자는 결코 그렇지 않다. 4) 나는 윤리적이고 변증법적이다. 그 여자는 미적이고 직접적이다. 5) 나는 동정적이다. 그 여자는 전적으로 직접적이고, 따라서 극히 순진하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불안의 개념』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185~188쪽 발췌
[2]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언제나 순종한 것처럼, 내가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지금과 같이 내가 없을 때에도 더욱더 순종하여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십시오. 역시 이 구절은 시편 55장 5절 5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를 참조한 것으로 보임
[3] 22장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4] 『Fear and Trembling』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39쪽
[5] 키르케고르는 불안을 이렇게 정의한다. “불안은 하나의 공감적인 반감反感이고 그리고 하나의 반감적인 공감이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다. 불안은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고 동시에 그 욕망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를테면 아담이 신께서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금지를 아는 순간 그 금지를 파기하고 싶은(신에게 반항 또는 저항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동시에 그 욕망(신에게 반항 또는 저항하고 싶은)이 동시에 두려운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어떤 가능성을 깨닫는 순간 그 가능성을 욕망한다. 하지만 그 욕망이 동시에 두렵다. 가능성의 존재인 자신이 죄를 지을 수도 동시에 막을 수도 있는데 그 주체는 결국 자신뿐이라는 사실, 그것이 불안의 바탕이라는 것이 키르케고르의 생각인 것이다.
[6] 무한한 체념이란 키르케고르에 의하면 신앙에 앞서는 최후의 단계를 말한다.(『Fear and Trembling』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55~71쪽
[7] 번제(burnt offering): 불에 제물(동물)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종교적 희생의식. 고대 그리스어 ‘홀로 카우스토스(holokaustos)’ 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희생양이 재로 변하는 희생 형태이며, 식사로 이어지는 동물 희생과는 다르다. 즉 재가 될 때까지 완전히 태워서 제사 지내는 방식이다.
[8] 무한한 것을 위하여 일체의 유한한 것을 체념하는 일밖에 못하는 사람은 ‘무한한 체념의 기사’에 불과하다. 그러나 무한한 체념은 ‘믿음’이 아니다.
[9] 아브라함이 여화와의 말씀에 복종하기 전까지의 자아는 앞서 이야기한 '윤리적 자아'에 해당된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계시에 복종하는 순간 그동안 믿었던 자신의 윤리를 포기하게 되므로 이 상태가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10] 『Fear and Trembling』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64~65쪽
[11] “믿음이란 곧 개별자가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는 역설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일은 이 운동은 반복되는 것이고, 따라서 개별자가 처음에 보편적인 것 안에 있다가 후에 와서는 보편적인 것보다도 높은 곳에 있는 개별자로서 고립된다고 하는 역설이다. 만일 이것이 믿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아브라함은 헛된 존재가 되고, 믿음은 항상 존재하여 왔다는 사실로 인해서 또 결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윤리적인 것, 즉 인륜적인 것이 최고의 것이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악, 즉 보편적인 것 안에서 표현되어야만 하는 개별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인간 속에 남지 않는다면, 그리스 철학이 소유하고 있던 범주 이외의 범주는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Fear and Trembling』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75쪽
[12]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이리하여 이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인 정지停止’를 내포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을 찾아낸 총명한 두뇌나 철저한 연구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의 지혜는 근본에 있어서 일체는 동일하다고 하는 아름다운 명제에 귀착된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본다면 세계를 다 뒤진다고 해도 단 하나의 유사한 것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Fear and Trembling』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69쪽
[13] “하느님께서 이삭을 요구하신다면 그는 언제든지 이삭을 기꺼이 바칠 생각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삭을 요구하시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동시에 그는 믿었다. 그는 부조리不條理의 힘으로 믿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인간적인 타산이 문제 될 여지가 없었고, 그에게 그 요구를 하신 하느님이 다음 순간에 그 요구를 철회하신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부조리이기 때문이다.” 『Fear and Trembling』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51쪽
[14] 그의 행위가 그의 감정과 절대적인 모순에 빠지는 순간에 있어서만 그는 이삭을 바칠 수가 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현실이 되면 그는 보편적인 것에 귀속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그는 살인자이고, 어디까지나 살인자로 남는다. 『Fear and Trembling』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88쪽
[15] 『Fear and Trembling』 쇠렌 키르케고르 지음, 임춘갑 옮김, 다산글방, 2015. 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