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21)
9.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염려(die Sorge)
1)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물음[1]
책의 중간 부분쯤에서 하이데거는 다시 현존재가 가지는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를 확인하고 현사실적[2]
으로(현존재의 일상성) 실존을 밝히려 한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일상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현존재의 일상성은 (세계)에 몰입하는 자기 존재에서 또 타자와의 공동존재에서 (자신의) 가장 독자적 존재 가능 자체를 문제 삼는 약해지면서 동시에 개시되고 피투이면서 동시에 기투하는 세계-내-존재”[3]라고 표현했다
.
즉 현존재인 우리가 타인들과 함께 일상을 유지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상황을 인식하여 현존재인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존재성을 침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던져진 존재이자 도모하는 존재의 양면성을 동시에 가진 세계 속에 유지되고 있는 현존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세계를 향해 드러내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태’(befindichkeit=흔히 정상성으로 번역됨)중 하나가 바로 공포(두려움)[4]였다.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개념을 더하는데 그것이 ‘불안’이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란 현존재가 세계를 향해 분명하게 열어 밝혀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2) 불안
공포와 불안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앞서 두려움에 대해 밝혔던 두려움의 속성[5] 바탕으로 두려움을 다시 세 가지로 분류한다. 즉 두려운 것(Wovor der Furcht), 두려워함(Fürchten), 두려움의 이유(Worum der Furcht)인데 각각은 다음과 같다.
- 두려운 것(Wovor der Furcht)
현존재 주변에 존재하는 가용적 존재자, 전재자, 그리고 타자(공동 현존재)들과 세계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6] 각각의 것들은 현존재를 기준으로 어디에서나 다가오는 것으로서 위협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은 현실적으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
- 두려워함(Fürchten)
현존재가 두려운 대상을 만났을 때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두려운 것이란 이미 세계 안에서 현존재에게 두려운 것으로 열어 밝혀져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현존재가 두려운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만났을 때 마음이다.
- 두려움의 이유(Worum der Furcht)
현존재 주변에 존재하는 가용적 존재자, 전재자, 그리고 타자(공동 현존재)들이 두려운 이유는 현존재 자신 때문이다. 존재하면서 스스로 존재의 이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현존재는 위협적인 것을 만나면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불안은 두려움과 달리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지 않는다. 두려움처럼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불안의 대상은 세계 내부의 존재자일 수 없다. 따라서 불안은 무규정적이며 무의의성이다. 여기서 키르케고르의 불안[7]과 차이를 논의해 보자.
키르케고르 불안의 핵심은 ‘금지’에서 기인한다. 즉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최초의 불안은 아담의 불안이었다. 즉 키르케고르는 대상을 가진 실증적 불안이었다. 그 대상은 다름 아닌 금지였다. 반면 하이데거의 불안은 그 대상을 불안 속으로 완전히 침몰시킨다. 즉 환경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가용적 존재자, 전재자, 타자, 심지어 세계까지도)는 현존재에게 그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적 무의의성이다.
좀 더 세밀하게 분리하자면 불안은 세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에게 그 어떤 의의도 없다는(무의의성) 것이다. 바로 그것이 불안의 핵심이다. 즉 무無[8]로 귀결된다. 즉 무가 두려운 것이 바로 불안인 것이다. 그런데 이 상황, 즉 Nichts und Nirgends(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는)가 세계부재를 뜻하지는 않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 무의의성을 가지게 때문에 역으로 세계는 독자적으로 열어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여기의 무의의성은 현존재가 가지는 마음의 상태일 뿐, 세계는 그리고 세계의 실존성이나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은 거기 그대로 있을 뿐인데 오직 현존재 마음의 상태에서 유추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불교와 긴밀하게 만나는 지점이다. 불교에서 이런 상황을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라고 부른다. 일체유심조란 화엄경[9]의 중심 사상으로서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임을 뜻하는, 일체 제법(모든 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는’은 바로 현존재의 세계에 대한 마음의 상태인데 이것을 無라고 인식하는 것은 바로 현존재 자신이다. 이로써 일체가 바로 마음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일체유심조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대승기신론[10]에서 하나의 마음(一心)이 진여문과 생멸문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진여문眞如門은 변치 않는 ‘본마음’이고, 생멸문生滅門은 육근[11]이 육경[12]과 부딪칠 때 생멸하는 마음인데, 이것은 번뇌 망상과 같은 마음으로 윤회의 원인이다. 따라서 윤회를 그치려면 저장되어 있는 마음의 찌꺼기들을 비워 내야 한다. 그렇게 마음이 ‘텅텅’ 비게 됐을 때, 즉 더 이상 생멸하는 번뇌 망상이 끊어졌을 때, ‘본마음’에 들어선다는 것이다.
[1] 하이데거는 SZ에서 ‘Die Frage nach der ursprünglichen Ganzheit des Strukturganzen des Daseins’, 즉 ‘현존재 전체 구조의 근원적인 전체성에 대한 물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현존재의 존재성에 대한 의문과 비슷한 의미로 해석되어 ‘현존재의 존재’라는 말로 줄여 썼다. 소광희(존재와 시간 강의, 문예출판사, 2022. 124쪽)는 ‘현존재의 존재’라고 표현.
[2] 현사실적: 실제로(faktisch) 존재하는
[3] SZ 11판, 1967. 181쪽. “verfallend-erschlossene, geworfen-entwerfende Inder-Welt-sein, dem es in seinem Sein bei der »Welt« und im Mitseinmit Anderen um das eigenste Seinkönnen selbst geht.”
[4] 앞부분, 제8. 9) 현(Da, 거기에)의 실존론적 구성 (1) 처해 있음의 유형, 공포 참조
[5] SZ 11판, 1967. 140~41쪽.
[6] SZ 11판, 1967. 140쪽
[7] 1절, 4, 키르케고르의 핵심개념, 1) 불안 참조
[8]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Nichts und Nirgends(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는), SZ 11판, 1967. 186쪽
[9] 화엄경: 대승불교 최고의 경전이다.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 본래 이름이다. 화엄경은 매우 방대한 경전이며, 화엄사상華嚴思想은 매우 심오한 사상이다. 화엄경은 궁극적으로 연화장세계連華藏世界에 대한 이야기이다. 화엄경의 연화장세계는 현상계와 본체, 또는 현상과 현상이 서로 대립하는 모습을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융합해 끝없이 전개하는 약동적인 큰 생명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화엄사상의 철학적 구조는 법계연기法界緣起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일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해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것이 화엄에서 가르치는 무진연기無盡緣起(끝없이 연속되는 원인과 결과)다.
[10] 인도의 마명(馬鳴, 아슈바고샤, Ashvaghosha, 100∼160?)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대승불교의 근본을 밝힌 책. 대승 경전에 설해져 있는 모든 사상을 종합적으로 회통(會通= 연결 지어 통하게 함)해 체계적인 논리를 세워 대승의 본질을 밝혀놓았다.
[11] 육근: 여섯 개의 감각기관인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를 말한다.
[12] 육근에 의해 일어나는 감각. 즉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말한다. 이로부터 6식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