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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23)

by 김준식

드디어 2편에 진입하였다.


10. 현존재의 시간성(Dasein und Zeitlichkeit)


1편에서 하이데거 이야기의 핵심은 현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한 예비적(vorbereitenden) 분석이었다. 결국 현존재는 세계 안에 있는(세계-내-존재) 것이다. 그런 이유로 당연히 하이데거는 ‘세계’를 분석하고 뒤이어 ‘세계-내-존재’는 누구인가를 살펴보기 위해 ‘내-존재’를 분리하여 해석하였다. 1편의 내용에 기초하여 본다면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핵심을 이렇게 정리했다. “세계 내부적으로 만나는 존재자(=현존재의 존재)는 세계에 몰입해 있음으로써 이미 자기를 앞질러 세계 내에 있음”[1]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이 곧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염려(마음 씀)이다. 이것은 거의 1편의 결론에 가까운데 다시 한 번 더 정리해 보면 현존재는 실존하고 동시에 피투적인 현사실성(=Wirklichkeit, 그렇게 살고 있는) 위에 퇴락해가는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마음 씀(=염려)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1편에서 지속적으로 묘사하는 현존재는 그저 일상성 속에서 본 현존재의 존재일 뿐이었다. 즉 근원적 존재와는 거리가 있어서 비본래적[2]존재를 본래적 존재로 회복시키기 위해 가져온 개념이 다름 아닌 불안(마음 씀의 유형으로서 염려)이었고 이 불안의 상황을 추가하여 다시금 현존재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 1편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현존재의 존재가 본래적이고 근원적이려면 현존재를 전체성과 본래성의 기초 위에서 관찰하고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3]즉 1편의 내용은 현존재를 단지 일상적 존재자, 즉 비본래적이거나 조건 없는 실존으로만 분석했다. 현존재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파악하려면 전체성이라는 조건 하에 현존재가 파악(혹은 포착)되어야 하고 동시에 현존재의 본래성이 담보되어야 한다. 여기서 2편의 핵심 개념인 시간이 개입되는데 전체성이라 함은 출생과 죽음(Geburt und Tod)을 기초로 하고, 본래성이라 함은 양심(Gewissen)에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4]




출생과 죽음, 그리고 양심을 통해 현존재의 전체성과 본래성이 확보되면 현존재의 존재의미를 좀 더 근본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조건이 형성된 것인데 하이데거는 일단 죽음의 문제에 대해 검토한다.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죽음에 의해 보증되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으로써 그 보증은 종료된다. 따라서 현존재는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 즉 죽음 안에 있는 존재(=죽음에 이르는 존재)[5]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독자적이고 확실하며 넘어설 수 없는 가능성이다. 가능성으로의 존재, 즉 현존재는 죽을 수 있는 존재로서 스스로와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이러한 관계는 가능성(=죽을 수 있는)의 존재 안에서 그 가능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가능성으로의 존재(=죽을 가능성을 가진)를 우리는 '가능성으로의 선구(vorlaufen)'라고 부른다.[6]



여기서 선구란 ‘앞으로 달려 나간다’는 의미이다.[7]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실존론적 기투, 즉 적극적으로 죽음을 추구하는 것인지 혹은 피투의 본질인지(어차피 애쓰지 않아도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인지) 결정할 수 없다. 다만 하이데거는 실존론적 기투에 의미를 둔다.(1편의 내용에 기초한다면)


하이데거에 의하면 양심은 ‘죄책감’(schuldig-sein)[8]에 근거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즉 본질적으로 피투적인 존재인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불러 일으키는 기투적 동인으로 해서 생겨나는 것이 양심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양심을 정의함으로써 현존재는 근원적이며 본래성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부분, 즉 본래성으로 되돌아 온다는 이야기와 불교의 본래면목[9]과 교차하는 지점이 있다. 본래면목本來面目이란 중생이 본래 가지고 있는, 인위가 조금도 섞이지 않은 마음을 일컫는다. 부처는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 한다. 본래면목과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근원적인 본래성은 몇 가지 유사한 부분이 교차한다.



먼저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존재는 단지 공空[10]할 뿐이다. 특별히 현존재인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다만 어떤 원인과 어떤 이유로(연기[11]) 생성과 소멸할 뿐이다. 그래서 무아[12]이며 무자성[13]이다. 하이데거의 피투적 존재로서의 현존재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원인도 결과도 알 수 없이 죽음을 향해(Sein zum Tode) 나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현존재의 근원성과 본래성을 회복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죽음’과 ‘양심’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죽음’이 주는 은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자성의 인식이다. 더불어 ‘양심’이라고 표현된 것 역시 무자성에 기초한 ‘본래면목’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여기에 다시 시간을 추가하고 있는데 시간은 지속되는 현재의 연결로서 단지 결과를 생성할(sich zeitigen)[14]뿐이다.



[1] SZ 11판, 1967. 192쪽



[2]비 본래적이라는 말은 분석의 대상이 된 것으로서 나타난‘사실(현사실성)에 근거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148쪽




[4] SZ 11판, 1967. 234쪽




[5] Sein zum Tode, 앞의 책 같은 곳.




[6]앞의 책 262쪽



[7]『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150쪽




[8]하지만 종교적 죄책감은 아니다. SZ 11판, 1967. 306쪽 각주 참조




[9]자성自性, 진아眞我, 불성佛性, 진여眞如, 일심一心 등으로 불린다.



[10]공空, 산스크리트어sunyata, 영emptiness: 텅 비어 있다는 형용사 ‘sunya’의 명사형 ‘sunyata’인데 텅 비어 있음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11]연기 緣起 patītyasamutpāda: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적이고 자생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즉 조건이나 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




[12]무아 無我, anatman: 무아는 아상我相에 반대되는 말이다. 아상이란 ‘나’를 내세우고, ‘나’란 실체가 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무아는 불변의 실체라 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13]무자성 無自性 산스크리트어 niāsvabhāva: 반야경에서 말하는 무자성無自性은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이다. 즉,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의미다.




[14]소광희는 『존재와 시간 강의』에서 시숙時熟이라는 표현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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