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레와 등대
중학교 철학 4권의 원고가 거의 끝이 보인다. 중학교 철학 1, 2, 3권 각각 부제가 있다. 1권은 ‘자유, 이성, 권력’이고 2권은 ‘변증의 산맥’이며 3권은 ‘인식의 그림자’다. 4권의 최초 부제는 ‘실존의 굴레’였다. 하지만 이 굴레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1월 초부터 걷는 동안에는 내내 이 부제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드디어 오늘 새벽…… 걷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쯤, 희미한 별 빛을 보고 문득 '등대'를 떠 올렸다. 그래 ‘실존의 등대’로 하자. 집에 돌아와 구글에서 ‘실존의 등대’를 검색해 보니 다행히 이런 부제나 제목의 책이 없다. 다행이다.
‘굴레’가 마음에 걸렸던 것은 속박의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사실 ‘실존’이라는 단어 자체가 엄청난 속박의 의미를 가지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그 말을 책의 부제로 하기에는 뭔가 애매했다. 그래서 한사코 다른 단어를 찾아보았으나 여러 단어가 입에서 맴돌 뿐, 1월 한 달 새벽 걷기 시간을 허비하고 말았다. 2월이 되고 오늘 17일에야 마침내 ‘등대’를 떠 올렸고, ... ‘실존의 등대’를 책의 부제로 정할 수 있게 되었다.
'등대'의 핵심은 어두운 밤에 항해나 바다의 수로 ‘안내’를 돕는 역할이다. 내가 쓰는 중학교 철학 4권의 주제는 실존인데 매우 난해한 세계다. 이유는 자명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설명하려고 하니 말이 말을 잇고 또 그 말이 그 말을 잇는다. 하여 앞 뒤가 섞이고 본말이 전도되기 십상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이유는 실존이 요즘 세상에 그렇게 긴요한 철학도 아닌 데다가 난해하여 자신의 해석이 자칫 다른 사람들의 공격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번역서도 흔하지 않고 또 자주 번역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점에서 너무나 자유롭다. 변방의 독립연구자인 나는 공격받으면 받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공격받을수록 나의 철학은 단단해지고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 1, 2, 3권의 경우 단 4분의 교수님께서 이 메일을 보내셨는데 그것도 거의 격려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번 실존 이야기도 앞의 세 권의 책만큼이나 의미 있는 작업이 될 듯하다. 매우 난해한 것을 그래도 조금은 쉽게 풀이해 보고자 안간힘을 썼고 마침내 내가 정한 목차만큼 정리되고 있다.
그래서 등대라는 말이 더욱 중요하다. 어차피 등대는 세상 전체를 환하게 할 수는 없다. 그저 여기가 등대라는 것, 그리고 위험하니 조심하라는 안내일 뿐이다. 나의 중학교 철학 4 권 ‘실존의 등대’가 딱 그런 역할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