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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25)

by 김준식

존재와 시간(25)


(2)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의 실존론적 기투: 죽음에로의 선구



현존재의 죽음을 거시적으로 통찰하여 ‘죽음’을 기준점(지금까지는 현존재를 기준으로 함)으로 다르게 표현하면 현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인데, 그 본래적 존재가 실존에서 기획투사, 즉 현존재의 의도[1]에 따라 실존의 범위 안에 죽음이라는 기점을 포함시키려는 태도를 우리는 ‘죽음에로의 선구’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황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묘사한다.


“현존재는 열어 밝혀져 있음에 의해서, 즉 처해 있는 이해에 의해서 구성된다.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는 가장 고유하고 무연관적인 가능성 앞에서 회피할 수 없으며 또 이러한 도피 속에서 그 가능성을 은폐할 수도 없고 '그들'의 이해를 위해서 바꾸어 해석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향한 본래적인 존재의 실존론적 기획투사는 그런 존재의 계기들을, 즉 존재를 앞에서 특징지은 가능성을 향한 도피하지 않고 은폐하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죽음을 이해함으로써 구성하고 있는 그런 계기들을 끄집어내야 한다.”[2]



이것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죽음을 향한 현존재의 상황을 ‘가능성을 향한 존재’로 파악해야만 한다. 즉 죽음에 대한 가능성(죽음에로의 선구)에 터잡아 죽음까지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왜냐하면 죽음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인데 가능한 죽음이라는 기점을 실존 속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방법론이다. 즉 최대한 죽음에 가까워진 상태에서 현존재는 스스로의 존재 가능성의 극단을 취하게 되는데, 이 상황이 바로 하이데거에 의하면 선구(Vorlaufen)라 부른다. 선구의 본질인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3]은 선구의 한계이기도 한 셈이다

.


그러면 죽음에로의 선구가 ‘본래적 실존’을 이해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선구는 죽음의 가능성을 어떻게 열어 밝히는가? 하이데거는 다섯 가지 예를 들어 그 질문에 답한다.[4]


⒜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특이한(독자적인) 가능성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앞서서 나아갈 때 마다 세상과 단절되는 계기가 되지만 죽음으로의 진행은 불가능함으로 현실에서는 단지 죽음이라는 사태로만 존재할 수 밖에 없다.


⒝ 죽음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무연관(몰 교섭[5])적 가능성이다. 이를테면 죽음 자체는 현존재 각각에게 매우 개별적이어서 그 어떤 연관성을 가질 수 없다. 동시에 죽음은 현존재에게 개별 현존재일 것을 요구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 때에 비로소 본래적으로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 죽음의 가능성(고유하고 무연관한)은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이다. 죽음에로의 선구는 현존재에게 자신의 실존 가능성의 극단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죽음의)가능성을 포기할 수 있도록 열어 밝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유한함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 위 ⒜ ⒝ ⒞의 가능성은 거의 확실하다. 각각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에서 현존재는 각각의 가능성이 언제나 열어 밝혀져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 조건으로 현존재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의 단계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게 함으로써 확실해지는 죽음은 현존재의 눈앞에 드러나게 되는데 이 때 그 사태는 무차별적(즉 중요도나 긴급함 동시에 가용적 존재자나 전재자를 포함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 위 ⒟의 확실한 가능성은 확실하기는 하지만 무규정적(즉 어떤 판단의 기준이나 나아가 해석의 기준도 존재할 수 없는)이다. 현존재의 죽음은 언제 어디서든 가능한 독자적인 사태이므로 현존재는 언제나 부단한 위협아래 놓여 있게 된다. 그 위협에서 유래되는 것이 불안이다. 여기서 다시 하이데거는 무無를 차용한다. 즉 불안의 가장 큰 이유는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인데 그 존재가능성이 죽음으로의 선구에 의해 무에 다가가게 되면 그 순간 현존재는 존재가능의 불안에 빠진다는 것이다.


[1]실존론적으로 죽음을 다루고자 하는


[2] SZ 11판, 1967. 260쪽


[3]『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166쪽


[4] SZ 11판, 1967. 262쪽


[5]소광희는 이 표현을 쓴다. 즉 거래의 가능성이 0(영)에 수렴한다.


아직은 추상으로 나아가기 전, 바실리 칸딘스키가 1898년 그린 오데사 항(흑해 최대의 무역항) 칸딘스키가 자란 곳이다.(고향은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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