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양심
앞서 우리는 현존재 전체성의 종말인 ‘죽음’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의 실존론적 기투’를 ‘죽음으로의 선구’라고 했다.[1]이를테면 ‘죽음으로의 선구’가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로서의 전체성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기게 된다. 죽음에로의 선구는 현존재의 죽음이 가지는 실존론적 또는 존재론적인 가능성을 통찰한 것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죽음이라는 구체적 사태를 실존하는 현존재를 통해 규명하려다 보니 ‘죽음으로의 선구’라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까지 만들어냈지만 결국 죽음을 넘어설 수 없는 분명한 한계를 자인한 셈이기도 하다. 문제는 또 있다. 현존재가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논의했으나 현존재의 실존적 존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증명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이데거는 이 부분에서 양심(Gewisse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현존재의 실존적 존재 가능을 증명하여한다. 물론 앞선 글에서 양심은 줄곧 등장해 왔다.[2]하지만 제 2편 제 2장 본래적 존재가능의 현존재적인 증명과 결단성, 제55절~60절에서 양심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한다. 2장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양심을 증거로 ‘본래적 존재가능의 현존재적인 증명’을 시도하려는 것이다.
일상적인 사람들은 본래적[3]으로 살기는 불가능하다. 당연히 비본래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다 보니 보통의 우리는 스스로의 고유성과 엄밀성을 망각하게 된다. 여기서 본래성을 회복하기 위해 현존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외길이다. 즉 본래성을 잃게 된 그 길로 다시 돌아오는 길 밖에 없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것은 오직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고유하게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그 자신에게로 되찾아오는 식으로만 되돌려 세워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되찾아옴은, 그것을 소홀히 함으로써 현존재가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상실해 버린 바로 그 존재양식을 가져야 한다. '그들'에서부터 자신을 되찾아옴은, 다시 말해서 '그들' 자신을 본래적인 자기 존재로 실존적으로 변양 시키는 일은 ‘선택의 만회’로서만 수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택의 만회’란, 이 선택을 선택함, 자신의 고유한 자기에서부터 하나의 존재가능을 결정함을 의미한다. 선택을 선택함에서 현존재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본래적 존재가능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4]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존재가 본래성을 회복하는 과정은 그 본래성을 자기 자신에게 제시하여야 하는데 무엇을 제시하고 그 제시를 통해 증명할 것인가를 양심의 목소리(Stimme des Gewissens)[5]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양심’이란 근본적으로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유통되는 의미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하이데거는 양심을 ‘비본래적, 일상적 현존재를 본래적 현존재로 돌려놓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 양심의 목소리(본래적 현존재로 돌아가라는 소리)에 따라 선택을 만회하여야만 본래적인 자기 존재로 변양(모습을 바꿈)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 양심은 비 객관적이며 비 전재적이어야 한다. 즉 각각의 현존재의 현사실성 부합하여야 하고(현존재마다 가지는 특수성) 동시에 미리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 동시에 법률적이거나 종교적이거나 심리적인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양심은 현존재의 모든 것으로부터 ‘열어 밝혀짐’(개시)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양심을 이야기한다.
“양심은 ‘어떤 것’을 이해하게 해 준다. 즉 양심은 열어 밝힌다. 이러한 형식적인 성격부여에서부터, 양심이라는 현상을 현존재의 열어 밝혀져 있음 안으로 되돌려놓아야 한다는 지침이 생긴다. 우리 자신이 각기 그때마다 그것인 이 존재자의 근본구성틀은 처해 있음, 이해, 빠져 있음, 말에 의해서 구성되고 있다. 양심에 대한 더 철저한 분석은 양심을 부름으로서 밝혀준다. 부름은 말의 한 양태이다.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를 그의 가장 고유한 자기 존재가능으로 불러내는 성격을 가지며, 그것도 가장 고유한 탓이 있음으로 불러 세운의 방식으로 그렇다.”[6]
여기서 ‘부름(ruf)’이란 사전적 의미로 ‘(특정 지점으로)오라고 불러들이거나 부르는 것’을 의미한다. ‘불러낸다(anruf)’는 것은 매우 적극적으로 부름의 의사를 전달한다는 것이며 ‘불러세움(aufruf, 혹은 불러일으킨다)’는 스스로에게 ‘부름’의 상황을 제공하여 그것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리해 보자면 양심이란 비본래적 삶 속에 퇴락(빠져 있는)해 있는 현존재에게 본래적 삶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일종의 고지인데 이것을 ‘부름’이라 하고 그 부름을 통해 현존재는 자신의 비 본래적 삶으로부터 본래적 삶으로 열어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양심의 부름을 연속적 과정으로 표현한 것이 ‘불러냄’이고 나아가 ‘불러세움’으로 표현한 것이다.
[1]『존재와 시간 강의』 소광희 지음, 문예출판사, 2003. 170쪽
[2]제1편 제3장 Die Weltlichkeit der Welt(세계의 세계성) 16절 세계적 합성, 24절 현존재의 공간성과 공간, 제4장 Das In-der-Welt-sein als Mit- und Selbstsein. Das ‘Man’(더불어 있음과 자기 자신으로 있음으로써의 세계-내-존재. ‘그들’ 27절 일상적인 자기 자신으로 있음과 ‘그들’ 제5장 Das In-Sein als solches(안에-있음 그 자체) 제35절 잡담 제6장 Die Sorge als Sein des Daseins(현존재의 존재는 염려) 제43절 현존재, 세계성, 실재성 등에 있다.
[3]독일어 ‘eigentlich’의 뜻은 본래의 참된 고유한 엄밀한 등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인간 본성 그대로의 삶이 본래적인데 보통의 사람들은 이러한 삶을 살 수 없다.
[4] Sein und Zeit, M. Heidegger, 이기상 역, 까치, 1998. 328쪽
[5] SZ 11판, 1967. 268쪽
[6] Sein und Zeit, M. Heidegger, 이기상 역, 까치, 1998. 3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