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심의 부름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한다. “현존재는 양심을 통해 자신을 부른다. 현존재는 양심을 부르는 자이자 동시에 부름 받는 자이다. (이 양심의) 부름은 나의 내면으로부터 나오지만 나를 초월한다.”[1]
너무나 당연하게도 양심은 절대로 외부적일 수 없다. 당연히 자신으로부터 나오며 그것은 매우 분명하게 자신에게 인식된다. 나로부터 일어나 나를 부르기 때문에 항상 현존재인 나를 질타하는 것에 가깝다. 세상 속에 던져 저서 퇴락해 가는 현존재는 언제나 염려[2]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염려가 양심을 부르는 것이다.
즉 세상 속에 던져 저서(피투 되어) 퇴락해 가는 존재인 현존재의 내부에서 자신의 퇴락에 대하여 고민하고 걱정하는(염려하는) 부름이 양심이라는 것인데 이 사실에 대한 하이데거의 표현은 이러하다.
“양심은 염려의 부름이다. 부르는 자는 피투 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능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는 현존재이다. 부름 받은 자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자기를 앞질러)[3]에로 불려진 바로 그 현존재이다. 그리고 현존재는 불러냄에 의해서 '그들' 속에 빠져 있음에서 불러 세워진다. 양심의 부름, 다시 말해서 양심 자체는 현존재가 그의 존재의 근본에서 염려라는 사실에 그 존재론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4]
양심의 부름은 침묵이지만 대단히 엄격하고 분명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부르는 자도 불리는 자도 현존재 자신이다. 그 부름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 예를 들어 ‘무엇을 알아차리는'을 전제로 하며 그 조건으로 하여 양심의 부름을 통해 현존재는 세상에 열어 밝혀질 수 있다.
그러면 이 양심의 구조는 무엇인가? 양심은 세상에 던져진 현존재의 약간은 불쾌한(unheimlich)[5]불안으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불쾌하다’거나 ‘으스스하다’거나 또는 ‘섬뜩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양심이 가진 본질에 해당한다. 현존재가 피투성(세상에 던져진)에 근거하여하는 세상에서의 행위들은 대부분 책임(Schuld)[6]이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실존에 따른 행위의 책임을 물어오는 양심의 부름에 대한 현존재가 가지는 느낌은 ‘불쾌하다’, 또는 ‘으스스하다’ 혹은 ‘섬뜩하다’라는 기분으로 해석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매우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경우이다.
첫째 책임을 진다는 것은 채무[7]를 지는 것과 같다. 이 경우 조건은 현존재와 타자(공동 현존재)와의 관계로부터 비롯된다. 둘째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일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즉 그 일이 아니었다면 이런 결과가 없었을 것이라는 상황에서의 책임이다. 둘 다 법률적으로 책임이 있을 수 있고 두 사례가 합쳐지면 법률 위반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현존재가 이러한 책임을 던져진 존재로서 모두 부담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해석에 가깝다. 왜냐하면 현존재의 모든 행위(기투)[8]에 책임을 지운다는 것은 오히려 현존재의 실존을 부정하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책임을 진다’는 것은 대단히 실존론적인 경우다. 이를테면 현존재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이상 언제나 염려를 가지게 된다. 현존재의 특성상 현존재는 자신에게 자신이 맡겨져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므로 당연히 자신의 존재 가능의 구조를 이해하고 그 구조에서 비롯되는 염려를 가진다. 하이데거는 그 염려로부터 유래되는 부름에 대하여만 ‘책임을 진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것이며 동시에 그래야만 현존재의 실존(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하는 용어가 ‘근거존재(Grundsein)’[9]인데 근거존재라 함은 자기의 존재를 결코 자신이 좌우하지 못하는 존재지만 오히려 그것이 실존의 근거가 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은 결코 그 근거에 대해서 권한이 없지만 그럼에도 실존하면서 근거가 되는 것’[10]이라고 설명한다.
“현존재는 끊임없이 자신의 가능성 뒤에 남아 있다. 현존재는 결코 자신의 근거에 앞서 실존할 수 없고 단지 각기 그때마다 오직 그 근거에서부터 그리고 그 근거로서 실존할 뿐이다. 그러므로 근거가 됨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를 근본적으로 결코 마음대로 지배하지 못함을 말한다. 이 ‘아님(Nicht, 못함)’은 내던져져 있음(피투)의 실존론적 의미에 속한다. 현존재는 근거가 되면서 그 자신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아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11]
하이데거가 사용한 ‘아님(Nicht, 못함)’은 부정적 의미이지만 사실은 현존재의 무력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즉 어쩔 수 없는 현존재의 한계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무력함은 현존재의 본질에 가깝다.
양심의 부름이 있다면 들음이 있어야 한다. 양심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현존재 스스로를 이해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즉 책임지는 존재로 기획 투사하는 것이다. 즉 현존재는 부름을 이해하고 그 이해에 기초하여 들으며 그것에 따르게 된다. 즉 현존재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듣고 움직이므로 자신의 실존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상황을 하이데거는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12]라고 불렀다.
[1] SZ 11판, 1967. 275쪽
[2] 9.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염려(die Sorge) 참조
[3]죽음에 대한 고찰 중에 ‘죽음에로의 선구’
[4] SZ 11판, 1967. 277쪽
[5]이 단어를 이기상은 ‘섬뜩한’으로 소광희는 ‘으스스한’으로 번역하였다.
[6]이기상은 ‘탓’으로 번역하고 소광희는 ‘책(責)’으로 번역한다.
[7]민법적인 청구권이 그 예이다.
[8]현존재가 의도하고 실행에 옮기는 모든 행위
[9] Grund(땅)과 sein(존재)를 합쳐서 근거존재라고 씀.
[10] SZ 11판, 1967. 282쪽
[11] Sein und Zeit, M. Heidegger, 이기상 역, 까치, 1998. 380쪽
[12] SZ 11판, 1967. 289쪽 “양심은 세계-내-존재의 불안함 속에서 염려의 부름으로, 존재를 본래적 죄책 가능성으로 불러 세운다. 이 부름에 대한 적절한 이해로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가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