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키 17
은유에 지친 2시간 17분
- 『미키 17』 관람 후기, 가능한 스포일러는 자제하려고 노력
감독이 봉준호! 무조건 보기로 하고 예매하고 극장 좌석에 앉았다. 처음엔 살짝 졸렸다.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관람하면 가끔 있는 현상이다. 시간을 표기하는 방식이 조금 새로웠지만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주인공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의 사고로부터 시작되는 기괴한 이야기는 137분 동안 이어진다.
1. 생명
생명은 창조되었는가? 이런 의문이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에 앞서거나 뒤 따르는 것은 당연히 누가? 왜? 어떻게? ….. 등의 질문일 것인데 이 영화에서는 ‘생명은 창조되었는가’의 질문에 아주 색 다른 답변을 제시한다.(엄밀하게 따지자면 창조라기보다는 복제에 가깝다.) 실험용 쥐처럼 소모되는 인간 복제가 영화적 모티브다. 그 방법 또한 매우 원시성이 가득한 첨단이다. 감독의 비꼬기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그 후 감독의 비꼬기는 우리의 예상을 훨씬 넘어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확장된다.
생명은 소중한가? 소중하다!! 누구나 인정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어떤 생명이 소중한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약간의 지연이 생겨난다. 가치가 개입되는 지점이다. 감독은 이 질문을 관객에게 던져놓고 아마 꽤나 이죽거렸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6도 윤회를 하는 모든 생명체가 모두 소중하기 때문에 어느 생명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영화적 공간이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심지어 우리 은하를 떠난 우주 공간이라면 불교의 6도 윤회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감독은 이 부분도 미리 계산에 넣은 것이 분명하다. 윤리나 철학, 종교나 신념이 모호해지는 어떤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서 윤리나 철학, 종교나 신념이 완전히 무시되거나 혹은 여전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2. 자본주의, 욕망
은하를 건너온 우주선에 여전히 지구의 그림자가 남아있으니 그것은 ‘사채’와 ‘계급’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다. 감독은 이전 영화에서도 자본주의를 아주 적절하게 양념으로 사용하여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번 영화 역시 자본주의는 이 영화의 주제에 가깝다. 자본주의의 부정적인 면이나 긍정적인 면이나 모두 자본주의 그 자체다. 영화를 유지해 가는 모든 에너지가 자본주의에서 나온다. 영화에서 티모(스티브 연 분)는 자본주의 그 자체다. 티모가 미키에게 던지는 모든 대사가 자본론 강의에 나올만한 명대사다. 듣기에 따라 다를 수는 있지만 “How does it feel to die?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이 대사는 이 영화가 가지는 영화적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 티모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것이 욕망이다. 실체 없는 욕망이지만 우주 공간 어디든 존재하는 것 역시 욕망이다. 오직 자신의 안위를 위한 티모의 욕망, 죽음과 삶을 반복하면서 욕망과 거리가 먼 듯 보이는 미키 17과 욕망 덩어리인 미키 18의 교차되는 욕망, 마셜(마크 러팔로 분)의 희극적 독재자(이 모습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너무나 흡사해 보이는)의 욕망, 일파 마셜(토니 콜렛 분)의 욕망은 공간과 시간을 가리지 않는 자본주의의 무서운 속성이다.
3. 벌레 크리퍼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으면 벌레보다 못하다는 말을 듣는데 행성 니플하임의 벌레들은 인간보다 살짝 상태가 좋아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를 벌레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에 살짝 불쾌했지만 원작의 의도가 뭐든 영화 안에서 벌레 크리퍼는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블랙코미디의 핵심을 담은 것으로 생각된다.
4. 지나친 은유
137분 동안 지쳤다. 너무 많은 은유는 블랙코미디의 신선도를 떨어뜨린다. 감독은 우리 감성이 아닌 모양이다. 우리에게 너무 과한 은유는 단지 기괴해 보일 뿐이다.
덧~~~ 미국 작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각색한 영화. 원작은 읽어 보지 못했음. 그리고 읽어 볼 생각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