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화의 오류(Faulty generalization 중 Hasty generalization-성급한 일반화)
주말을 밀양 모처에서 보냈다. 어디나 덥다. 밀양의 산들은 온통 소나무 재선충으로 죽어가고 있고 이미 죽어서 붉게 변해 있었다. 거기다가 얼음골 사과 동네와 걸맞게 온통 사과 과수원인데 새벽부터 농약이 살포되고 있었다. 농촌에서 자란 나의 걱정은 동네 주민들의 건강이었지만 내 걱정 따위가 개입할 틈은 없어 보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여러 문제 상황을 자신도 모르게 정리하는, 즉 일반화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는 쪽보다는 뭔가를 재빨리 결정 지으려는 경향을 문득문득 발견한다. 나의 내부에서 검토나 합의, 혹은 협의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진다. 이것이 나이 먹는 것이라면 참 나이 먹는 것이 안타깝다.
주말 동안 거창에 계시는 차승민 선생이 올린 아동 훈육에 대한 글을 보면서 집 아닌 곳에서 몇 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교사로 정년을 맞이하면서 내가 훈육한 아이들을 생각해 본다. 訓育은 가르침이 보다 강조된 개념이다. 보통의 가르침보다 더 강조된 가르침이란 약간의 강제성이 따른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강제성은 없더라도 분명한 기준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정도의 교육행위다. 결론적으로 나는 정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여전히 아이들에게 훈육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고 또 사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 때 자기주도학습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지금도 자주 쓰이는 이 단어는 사실 1968년 미국의 평생 교육학자인 말콤 놀즈(Malcolm Knowles, 1913~1997)가 발표한 ”아동교육이 아닌 성인교육(Andragogy, not pedagogy)”이라는 논문에서 성인교육(andragogy)과 아동교육(pedagogy)에는 차이가 있으며, 교사가 주도해야 하는 아동교육에 비해 성인교육은 ‘자기 주도 학습’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나온 아동 교육에서의 ‘교사 주도’가 사실은 훈육에 가깝다. 차승민 선생의 의도를 내가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 학교 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할 교육의 대부분에서 훈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훈육 없이는 초. 중. 등 교육은 어렵다고 생각한다. 교사의 훈육은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꺾는 장애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가 될 가능성이 더 농후하다. 이유는 자명하다.
교사가 교육과정을 통해 기성의 지식과 태도를 제시하면, 아이들은 자유의지에 의해 그것들 중에서 취사 선택하고 그것을 강화, 성장하는 것이 학교 교육의 본질이라고 가정한다면, 훈육은 각 지점마다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정표일 수밖에 없다. 교육은 그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각 지점, 요소마다 훈육이라는 이정표를 제시하고 그다음 아이들의 자유의지를 믿고 기다려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 이야기가 정말 성급한 일반화일까? 를 두고 어제오늘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