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無
1.
하이데거에 집중한 지난겨울의 결과물이 중학교 철학 4권으로 출간된 지 벌써 두어 달이 지났다. 사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존재에 대하여 논의했으며 그 과정을 통해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마침내 서양의 형이상학이 다가가지 못했거나 다가가지 않았던 ‘무無’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형이상학에서 無는 부정적인 것(das Nichthafte, das Nichtige), 혹은 부정된 것(das Verneinte)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하이데거와 불교, 김진, UUP, 2004. 45쪽) 대표적으로 기독교 철학에서 無는 창조주의 반대에 서 있는 개념이다. 하이데거도 여기에 거의 동의하면서 이렇게 표현했다. “만약에 신이 신이라면, 그리고 절대자가 그 자신으로부터 모든 부정적인 것을 배제시킨다면, 신은 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하이데거 『Wegmarken』 Nachwort zu "Was ist Metaphysik?" 1943, 117)
하지만 無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는 단지 부정적인 것에서 멈추지는 않았다. 하이데거는 무에서 더 나아간 개념으로 무화(Nichtigung)를 창조해 낸다.(WM, 114) 무화로 나아가기 위해 하이데거는 다시 『존재와 시간』의 불안의 개념을 가져온다. 하이데거의 불안은 그 대상을 불안 속으로 완전히 침몰시킨다. 즉 환경세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자(가용적 존재자, 전재자, 타자, 심지어 세계까지도)는 현존재에게 그 어떤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즉, 무의의성에서 불안이 도출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좀 더 세밀하게 분리하자면 불안은 세계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에게 그 어떤 의의도 없다는(무의의성) 것이다. 바로 그것이 불안의 핵심이다. 즉, 부정적 소멸... 무無로 귀결된다. 즉 무가 두려운 것이 바로 불안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상황, Nichts und Nirgends(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데도 없는)가 세계부재로 나아가지도 않는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이 그 자체로 무의의성을 가지게 때문에 역으로 세계는 독자적으로 열어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 자신 조차도 세계부재의 무게를 견뎌낼 힘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2.
無는 없다가 아니라 없어졌다는 뜻이다. 즉 뭔가 있었는데 특별한 원인에 의해 완벽하게 사라진 상태를 말한다. 처음부터 없다는 의미는 空의 의미와 유사하다. 한자에서도 無를 풀이할 때 破字하여 大(큰대)의 변형 + (수풀이 우거진 모양) + 火(불화)로 해석한다. 즉 완전히 불타서 남아있지 않는, 혹은 사라진 상태를 無라고 했다.
그런데 無를 영어로 번역하면 zero, nothing, nought인데 사실 空으로 수렴해 버린다. Zero의 어원을 따져보면 산스크리트어 sunya인데 이 말은 곧, 공을 표현하는 말이다. 이를테면 무와 공을 구별하는 구체적 이익이 없다는 말이다. 무나 공이나~ 식으로 인식되지만 나에게 있어 무와 공은 달라 보이기는 한다.
공은 사실 매우 특수한 개념이다. 공空, 산스크리트어 'sunyata', 영어 'emptiness'로 번역될 수 있다. 산스크리트어 형용사 ‘sunya’(텅 빈)나 명사 ‘sunyata’(공한 것)의 번역이다.
공空에 대한 생각의 체계, 즉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핵심이다. 따라서 공空사상은 불교를 지탱하는 거대한 사상적, 철학적 기둥이다. 공사상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로써 공이 현상화 된 것이 인연因緣이다. 용수(나가르주나)는 중론中論에서 인연으로 생겨난 즉 중인연생衆因緣生이 모두 공하다고 했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서로 얽혀 있는 관계(인연)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존재이므로, 그 모양이나 형태, 또는 그 성질이 불변하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무아'다. 무아는 다시 '무자성'으로 연결되는데 무자성의 핵심이 바로 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