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전부터 장자께서는 염소를 끌고 가는 아낙 그림을 한 참 쳐다보신다. 그 그림은 독일 출신 인상파 화가 Max Liebermann(1847–1935)의 Frau mit Geissen in den dunen(언덕 위에 있는 여자와 염소)다.
장자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나직하게 묻는다.
“자네는 저 여자와 염소의 관계를 어찌 생각하나?”
“고삐가 없어도 여자 뜻대로 가는 염소와 가지 않으려는 염소 중 어느 염소를 말하는 것인지요?”
“당연히 반대로 가는 염소와 여자를 묻는 거 아니겠나?”
“여자와 염소는 방향이 다른데 여자가 염소에게 자기 방향을 강요하는 듯 보입니다.”
장자가 빙그레 웃으면서
“그렇게 보이나?”
“나는 말일세 좀 다른 생각일세!”
“말씀해 주시지요!”
“언제가 내가 말한 그림자 이야기 아는가?”
“혹시 망량과 경의 이야기 말씀인지요?”
“그렇지~!”
“자네의 눈으로 여자와 염소를 평가하는 것은 마치 희미한 그림자 망량이 짙은 그림자 경에게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나?”(우언)
“그림은 관객의 생각대로 보는 것이니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약간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렇지! 그건 자네의 자유지! 하지만 말일세… 저 그림 속에 있는 염소와 여자는 각자의 세계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일지도 모르네…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는 것은 문제를 복잡하게 하고 필요 없는 논쟁을 키울 수도 있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림을 보는 순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적 해석, 즉 주인과 노예의 도덕으로 이 그림을 이해하려 했다. 주인과 노예의 도덕으로 이 그림을 해석하면 꽤 분명해지는 느낌이다.
이를 테면 주인이 생각하는 도덕은 미래에 대한 확신과 미래에 대한 보증, 그리고 창조력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스스로 강하게 믿고 있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방향으로 모든 것을 이끈다. 즉 여자는 주인으로서 염소를 자신의 방향으로 끌고 갈 당위가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노예의 도덕은 비현실적이며 이상적이다. 따라서 염소는 주인이 끄는 방향의 반대로 머리를 돌리고 있기는 하지만 뚜렷하게 반대 방향으로 가려는 의지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관점으로 본다면 또 한 마리의 염소(이미 여자와 같은 방향으로 돌아서버린)는 주인에게 이미 동화된 노예로서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노예보다 뒷모습은 오히려 더 쓸쓸해 보인다. 뭐 이런 식이다. (Nietzsche "Jenseits von Gut und Böse: Vorspiel einer Philosophie der Zukunftt", 1886 - 선과 악을 넘어서 참조)
한 참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장자께서 이렇게 물으신다.
“그림 속 언덕에 길이 있으니 그 길로 가는 것이겠지?”
“그렇겠지요”
“서로의 본성을 모르는 모양이야. 상대의 본성을 모르면 아무리 합당한 일이라도 일을 그르치게 돼지!”(인간세)
“그럼 저 여자는 염소의 본성을 모른다는 말인지요?”
“내가 저 여자 중심으로 이야기했나?”
“그럼 염소도 여자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는 이야기인지요?”
이 때다 싶어 집요하게 묻는다.
“자네는 처음부터 염소는 생각에 없었던 것 아닌가? 여자 중심으로 그림을 이해하고 그렇게 평가했던 것 아닌가?”
“……”
“내가 말한 제물이란 모든 것을 분별하지 않는 것이지!”(제물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