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와 고요함.

by 김준식
Regenschauer in Partenkirchen, oil on canvas, 21.5cm* 24cm, 1838


소나기와 고요함.


소낙비가 퍼붓는 시골 저녁쯤, 일 나갔던 부부가 돌아오는 장면을 그린 아주 작은 그림을 보시며 장자께서 문득 혼자 말씀을 하신다.


“고요함이군!”


소낙비가 와서 가축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번개가 치면 어지러울 것이 분명한데 어찌 고요하다고 하실까?


“고요한 이유가 있는지요?”


빙그레 웃으시며 나를 보시고 뚜벅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음을 비우면 고요해지지!”(천도)


그림 속 시골마을에 소나기가 퍼붓고 있다. 바람도 거세다. 우산을 든 아주머니는 아마도 가축들을 몰고 가다가 비를 만난 듯하다. 비바람이 거세서 우산을 들어도 별 소용이 없어 보인다. 하늘에는 비바람에 놀란 새 떼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아주머니 뒤로 따라오는 아저씨는 우산도 없이 개와 함께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아마도 부부가 가축을 들판에서 몰고 집으로 오다가 비를 만난 모양이다. 화가는 지붕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다히너’Dachrinne(빗물받이, 홈통)에 넘쳐흐르면서 바람에 흩날리는 모양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비가 갑자기 쏟아지는 바람에 이미 마을 길은 수로처럼 물이 흐른다.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무엇인지요?”


“노자께서는 일찍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지! (도덕경 16장)”


“뿌리로?......”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몰라하는데 장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지!”


“지나온 날들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말씀하시는지요?”


“아니네! 그저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것은 아니라네! 마치 남영주(경상초)처럼 정말로 자기 뒤를 살피는 것은 어리석음이지!”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지요!”


“빛이 비치지 않는 자신의 마음속 어두운 곳에 스스로 불을 밝히는 것과 비슷하지!”


“스스로 숨기고 싶은 것과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을 하나 둘 발견하고 그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을 정리함이 곧 돌아 봄이지! 그런데 이런 일은 시간과는 거의 관계가 없을 수도 있네! 모든 것은 순식간에 일어나기도 하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힘들 수도 있겠군요. 어쩌면 몹시 아플 수도……”


“아픔을 넘어서야 그것이 돌아봄이 되고 그래야만 고요해지지! 저 그림을 그린 사람은 아마도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거야!”


“저 그림 중에 누가 그런 상황인가요?”


“뒤에 비를 맞고 천천히 걸어오는 남자라고 생각하네!"


“단지 비를 맞으며 걷는다고 고요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지요?”


“사람도 자연의 일부인지라 자연 현상 앞에는 누구나 쉽게 영향을 받지! 그런데 저 남자는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비를 피하지도 않고 천천히 가축들과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보통의 경지가 아니지! 단지 비를 피하지 않음이 아니라 스스로 고요해지니 자연의 변화, 나아가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극진하지만 겉으로는 고요했던 맹손재(대종사)와 비슷한 경지라네!”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곡읍哭泣할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으며, 마음속에 슬픔을 느끼지 아니하고, 상을 치르면서 서러워하지도 않았던 그 맹손재 말씀인지요?”


“그렇다네! 거센 소나기에 순응하고 동시에 동화同化되어, 알지 못하는 변화를 기다리는 저 남자의 태도가 맹손재와 닮아있지!”(대종사)


“저 부부의 삶이 곧 자연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군요!”


나도 모르게 이런 장식적 발언을 했더니


“자네가 그 경지를 어찌 알겠나~!”


역시 까칠한 장자 선생!


*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독일 남서부 Pirmasens에서 1802년에 태어난 Johann Heinrich Bürkel(1802~1869)이다. 그와 친구였던 Carl Spitzweg(1808~1885)와 함께 풍속화의 한 부류로 분화된 비더마이어 풍의 대표적 화가이다. 그는 알프스 지방 사람들의 생활과 풍경을 주로 그렸다. 19세기 중엽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의 풍경화는 매우 정적이며 시적 은유를 담고 있는 낭만적 경향의 퐁텐블로 숲의 바르비종파로 대표된다면, 독일은 역동적 풍경에다가 소시민적이고 실리적인 풍속까지 더한 비더마이어 풍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문화적 차이이면서 동시에 사물에 대한 접근과 해석의 차이에서 유래된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