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움과 방탕함, 그리고 道
문득 장자께 여쭤본다.
“자유롭다는 것은 제한이 없음인지 아니면 제한을 모르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한이 없다고 하면 처음부터 자유라는 말이 없을 것이고, 제한을 모른다고 하면 무지이지 자유라고 하겠나?”
“왜 그러나?” 장자께서는 의아해하시며 나를 본다.
“저 그림을 보면서 저들의 모습이 제한이 없음인지 혹은 제한을 모르는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장자께서 내가 가리킨 그림을 물끄러미 보시더니
“저들은 현재 자유를 넘어 방탕한 모습이지 않나?”
“방탕은 무엇인지요?”
“혜시가 자신의 재주를 너무 믿어 마음대로 만물을 쫓아 그림자와 경쟁하고 심지어 그림자와 떨어지려 함이지!”(천하)
“그럼 혜시는 방탕한 사람이었는지요?”
“어떤 면은 그렇고 또 어떤 면은 그렇지 않지!”
“그림에 있는 저들도 늘 저 모습은 아니지 않겠나?”
“지금 저 그림의 상황을 방탕함으로 보아도 되는지요?”
“그렇지!”
교외의 허름한 유곽에서 세 쌍의 남녀와 한 명의 노파가 모여 거나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다. 아마도 노파는 이 술집의 주인일 것이고 나머지 젊은 여자들은 술집에 종업원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화면에 대각선으로 누워있는 남자의 옷이 등불에 푸르게 비치고 있다. 그 남자의 종아리에는 매듭이 묶여 있는데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 군인들 복장이 이와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나머지 남자들의 모자들도 예사롭지 않다. 근위병들이 쓰는 깃털 모자에 가깝다. 아마도 근무를 마친 군인들이 근처 술집에서 아가씨들과 술을 마시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헤리트 반 혼트 호르스트(Gerrit van Honthorst 1592~1656)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화가로 유트레히트 화파의 대표적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유트레히트 화파란 17세기 초, 네덜란드 유트레히트를 중심으로 활약한 일군의 화가들을 말한다. 그들의 공통점은 지역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신교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가톨릭을 신봉했고 동시에 어김없이 이탈리아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방탕함은 도의 다른 면일 수도 있다네! 제멋대로 소요하면서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도의 실체이기도 하거든”(대종사)
“그럼 방탕함이 道로 해석되기도 한다는 것인지요?”
“아니지! 道의 본모습이 제한 없음이니 제한 없는 방탕함도 道의 모습 중에 하나라는 이야기지!”
“그럼 저 유곽에 술 마시는 자들의 모습 중에 道의 그림자도 있다는 말씀인지요?”
“도는 선과 악을 넘는 것이며 미(美)와 추(醜)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니 저들의 모습 중에도 道의 그림자는 있을 수 있지!”
“……”
“못 믿는 표정이군!”
“문해군 앞에서 잔인하게 짐승의 뼈와 살을 분리하는 것을 보여준 포정의 행동에서 道를 읽어 내는 것이나(양생주)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방탕하게 즐기는 군인의 모습에서 道를 읽어내는 것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