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불편한 나의 생각

by 김준식
Andy Warhol, Bighorn Ram 1983 이다. 여기에 숨어 있는 서양식 사고들을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대부분 금방 알아차린다.

불편한 나의 생각


여름 방학이 다가오면 학교에는 교사 대상의 수많은 연수 공문이 쇄도한다. 선생님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배워야 한다는 것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연수 공문은 너무 많고 또 다양하다. 나 역시도 지난 세월 엄청난 연수를 방학 중에 들었지만 사실 기억에 남는 연수는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어쩌다 연수를 통해 배운 새로운 교육방법은 학교 현장에서 번번이 좌절을 겪었다. 당시는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했으나 세월이 지나고 나니 어렴풋하게나마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특히 두어 해 전부터는 교육방법에 대한 연수가 많은데 이를 테면 최근 유행되는 다른 나라(특히 북유럽식 또는 이스라엘식 그리고 일본식)의 교육방법 연수가 많아졌다. 사실 나는 이 방면에 완전히 문외한이지만 교사이기 때문에 교육방법에 대한 고민은 교직 생활 내내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완전히 문외한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점이 분명히 있다. 각 교육방법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는 현재의 나의 식견으로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늘 하게 된다.


다양한 나라의 교육방법을 배우면서 이러한 교육방법이 생긴 그 나라의 문화적 역사적 전통과 관습, 그리고 그들의 제도와 정치적 상황 등을 아는 것이 우선일 것인데 프로그램 속에는 그러한 내용은 없거나 있어도 너무나 적다. 30시간 연수 동안 "이런 것이 있으니 한 번 적용해 보세요" 라는 식이다. 방학을 마치고 나면 그 연수를 들은 선생님들이 지도하는 아이들은 바로 교육방법 마루타가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해지거나 아니면 교사만 열중하게 되고 일부 교사는 그것을 이용하여 개인적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고 만다.(각 종 현장지도 논문 혹은 지도 사례 대회 등등) 불편하지만 대부분 현실이다.


해방 이후 우리의 교육은 일본의 교육방법을 답습했다. 거기에 미국의 교육과정을 적용시켰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끔씩 양념처럼 혹은 유행처럼 유럽식의 교육방법을 끼워 넣기도 했고 또 가끔은 독창적이라는 미명이래 여기저기에서 가져온 기이한 교육방법을 덕지덕지 붙였다. 이것이 우리의 교육방법이고 교육과정의 현주소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교육방법과 교육과정은 다른 이야기지만 현장 교사에게 이 두 단어는 온통 뒤죽박죽 섞여서 사실 분리해 낼 능력이 거의 없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실에서 이 두 개의 단어를 엄밀히 구별해내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교육방법이나 교육과정이 딴 나라 것임에도 우리는 그러한 교육과정 아래 잘도 적응하여 살아왔다. 따지고 보면 우리 전통의 교육방법이나 교육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한 현대적 응용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우리는 서양의 교육학자들이나 그들의 이론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들이 한 말이나 그들의 교육방식에 대해 엄청난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게 된다. 여기에는 서양 여러 나라의 교육을 배운 유학파 교육학자(대 부분 대학 교수들)들 밑에서 배운 교사들의 역할과 그 교수들이 자행한 깡패 식의 파벌 교육, 또는 밥통 보존을 위한 앵벌이 교육(좀 과격한 표현이지만 주제를 크게 벗어난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등이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정리하자면 수 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문화와 전통을 가진 우리가, 우리 것이라고는 거의 전무한 방식으로 우리의 아이들이 키워냈고 또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우리의 전통을 이야기하고 우리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참 웃기는 이야기다.


그러면 정확히 지금의 우리 교육과 앞으로의 교육은 어떨 것인가? 역시나 우리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외제 투성이 교육방법 교육과정 일부는 썩어버린 힘없는 나무 등걸(이제 한 70년쯤 나니 먹어 베어 내기에도 어려운)에 다시 외제투성이의 다양한 교육방식을 접 붙이려는 지금의 상황은 참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우리 옛 것을 오늘에 되살려 뭔가를 해 보자는 식의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무나 빨리 유행처럼 지나가는 교육방법, 교육과정을 이제는 현장과 유기적으로 연계시켜 좀 더 우리에게 적합한 방향으로 개정하고(2015 교육과정이 이미 시행되고 있지만 그 연수를 들으러 가서 나는 내내 교육부 관계자와 다투기만 했다.)동시에 교사에게 매우 절실한 “깊이와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교육과정을 개발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말을 하는 내가 참 공허해 보이기는 한다. 실현가능성이 낮다는 이야기다.


북유럽에서 성공한 그들의 교육을 선전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나는 묻고 싶다.(경남교육정보연구원이 펴낸 경남교육 2016년 여름 호에 이 기관의 원장이 쓴 권두언을 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든다.) 북유럽 사람이 겪어 온 지난 수 천 년의 지리적 문화적 삶의 과정을 이해하고 있느냐고? 몇 년 거기서 살고 그 지역을 연구했다는 것으로 그들의 의식과 문화를 그리고 그로부터 출발한 교육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은가? 사실 그 모든 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삶에서 우러나온 방식이기 때문에 배울 수도 익일 수도 없는 그들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 비슷하게 맞는 장자 속의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환공’이 당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 편’이 당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다가 망치와 끌을 놓고 물었다.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말(言)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지.”

“성인은 지금 살아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군요.”

‘환공’이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만드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인가! 설명을 하면 괜찮지만 그렇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윤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의 일(수레바퀴 깎는 일)로미루어 생각해보면 수레를 만들 때 너무 깎으면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 입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而應於心口不能言) ”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서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그막인 70 나이에도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겁니다. 옛사람도 그 전해 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수레바퀴를 만드는 일은 말로 전달해 줄 수 없는 일이며, 성인의 말씀도 옛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도(道)는 마음으로 응(應)하는 것이지 입으로 말(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자 외편 13 천도(天道)

그렇게 출발한 그들의 교육방법을, 문화도 환경도 전혀 다른 우리나라에 소개하고 그것이 상당히 우수하고 매우 선진적인 방법인양 이야기하는 것은 현장 교사로서 조금 불편하다. 저 유명한 페스탈로치라는 사람도 당시 그 나라에서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렇게 방법을 선택했을 뿐, 우리에게 그의 이론이 그의 생각이 적합할지 혹은 적합하지 않을지 모르는데도 우리는 지난 세월 그의 이야기를 금과옥조처럼 배우고 익혔다. 사실 우리는 이런 면에서 모두 교육을 통한 정신적 불구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정말 필요하고 정말 필요 없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불구 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