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色卽是空
비가 내리고 그치다가 다시 흐린 날씨 탓에 조금 우울해졌다. 50대 중반의 우울 인지도 모를 이 찜찜한 우울이 일요일 하루 내내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있지만 딱히 호흡을 방해하거나 일상을 침범할 정도의 우울은 아니다. 우울함이란 내 육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의식의 작용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결국 이 우울은 나 스스로 만들어 낸 假像狀況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스스로 만들어 낸 감정의 무게에 눌려버리는 이 어리석음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순간, 나의 우울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춰버리고 만다. 하지만 한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우울의 바닥에는 나의 이기심과 나의 분별 심, 그리고 연질의 각종 감각들이 뒤섞여 실체도 아닌 그렇다고 허상도 아닌 그 어떤 것을 만들어 놓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Ⅱ. 諸法空想
나무나 건물의 구석진 곳에 가는 거미줄이 곳곳에 쳐지는 계절이다. 거미는 거미집에 붙은 작은 벌레의 체액을 빨아먹고 산다. 거미줄을 통해 먹이를 공급받으니 엄밀히 말하면 거미집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그러하다는 이야기다. 하기야 거미 입장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있을 리 없다. 내가 거미와 거미집에 마음을 두고 거미를 관찰한 순간 이 모든 이야기는 즉시 생겨난 것이다.
하여 내가 집중하는 곳에 늘 세상과 그 내부의 갈등이 생겨난다. 내가 관심 두지 않는 곳은 언제나 평화요 자유며, 완전함이다. 뒤집어 보면 내 마음이 모든 분란과 갈등의 원인이요 시작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잡아 두고 함부로 뻗치지 않게 해야 하는데 날이 더워지면 갈수록 그것이 힘들어진다.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쓰레기처럼 이곳저곳에 내 마음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볼 일이다.
Ⅲ. 不增不減
태양의 복사열로 올라가는 온도는 지극히 객관적이지만 그 온도를 느끼는 더위는 순전히 주관적이다. 나의 더위는 온전히 나의 것이므로 객관적인 온도와 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자질 구래한 일들이 내 주위를 맴돌며 나를 덥게 하지만 그 더위는 매우 주관적이다. 하여 에어컨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다. 지난 금요일이 소서였 다. 지구에 근접한 태양에서 쏟아지는 뜨겁고 단단한 햇빛이 조건 없이 내리쬐는 날들이 앞으로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그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내 마음은 항상 내가 주인이어야 하는데, 아주 사소하고 미미한 바람과 자극에도 너무 쉽게 내 마음을 내려놓고 마는 이 어리석음이 그저 안타깝다. 아직 공부가 부족한 탓에 그렇게 내려놓은 마음에 여기저기 또 이런저런 상처가 난 후에야 비로소 함부로 마음 내려놓은 잘못을 깨닫게 된다.
Ⅳ. 一切苦厄
새 학교로 옮기고 난 뒤, 학기 초에 내가 이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고민해 보았다. 이 학교는 나의 역할이 지극히 제한적이라 그저 내가 잘 견디는 것이 주요 관건이었다. 학기 초부터 1학년 교무실 선생님들께 아침에 커피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의 하루를 열어보자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잘 유지해 왔다. 이제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쩌면 한 학기 동안 선생님들께 커피를 제공하는 일이 잘 유지되리라고 본다.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했을까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일로 해서 나의 삶이 좀 더 여유로워졌고 더불어 여러 선생님들이 아침 시간을 좀 더 행복하고 향기롭게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돌이켜보니 이런 일조차도 그저 남섬 부주에 사는 번뇌 투성이 인간의 좁은 소견임을 깨닫는 밤이다.
Ⅴ. 色不異空
며칠 전 장맛비 내리던 날 학교 화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로운 흙냄새를 잊을 수가 없다. 거기에는 약간의 풀 냄새와 오래된 부엽토 냄새 그리고 땅의 그윽함이 있었다. 짧은 순간 일어나는 코의 화학작용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깊고 강렬한 이 냄새의 기억.
하지만 그 냄새의 기억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이미 소거되었거나 혹은 지나치게 강조되어버린 내 기억의 왜곡과 마주하게 된다.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에서 소거 혹은 제거되거나 강조 혹은 증폭되어온 나의 기억의 줄기들은 나의 감각기관 곳곳으로 촉수를 뻗어놓고 있는데 나의 일거수일투족과 함께하면서 또 다른 조작과 왜곡의 과정을 형성해나간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의 기억이란 또 나의 추억이란 얼마나 공허한 오류투성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