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변성과 주관성
Luka Sulic - Rachmaninov Vocalise
http://www.youtube.com/watch?v=SVyza9jzw18
슬로베니아 출신 미남 첼리스트 Luka Sulic 의 연주로 라흐마니노프의 보칼리제를 듣는다. 보칼리제(Vocalise)란 원래 가사가 없는 모음으로만 부르는 성악곡을 말하는데 첼로 연주의 보칼리제는 슬프다.
可變性은 오랜 숙제다. 인식의 主觀性 역시 언제나 풀리지 않는 문제다. 늘 窮究해 보아도 문제만 깊어질 뿐이다.
오늘 오전 독서모임에 초청받아 이야기하던 중,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결국 나는 이 두 가지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물론 나의 이야기를 듣는 분들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可變性과 主觀性이야말로 내 지식과 삶의 위해 요소임을 깨닫는다.
하기야 일찍이 헤겔(G. W. Hegel)은 그의 명저 『정신현상학』(Phänomenologiedes Geistes)에서 이런 문제에 대해 ‘자기의식의 지양’이라는 말로 이 문제를 분석했다.
그런가 하면,
육조 ‘혜능’과 ‘신수’(오조 흥인 선사 밑에서 참구 하여 오조 제 일위였다)와의 禪問答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식의 주관성과 가변성을 격파한다.
신수가 이렇게 이야기한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惹塵埃(신시보리수 심여명경대 시시근불식 막사야진애)
“몸이 곧 진리의 나무라면, 마음은 곧 밝은 거울의 틀이다.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때가 끼지 않게 하라.” 이렇게 이야기하여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오조 흥인으로부터 의발을 물려받지 못한다.
그러자 혜능은 이를 듣고 답을 했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진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니다. 본래한 물건도 없거늘, 어느 곳에 먼지와 티끌이 일어나겠는가?”
결국 혜능이 의발을 물려받는다.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