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r griechische Priester(그리스 수도사)
高人惠中(고인혜중) 고고한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을 사랑하고
古鏡照身(고경조신) 오래된 거울에 또 스스로를 비춰보네.
(사공 도 24시품 인용)
反省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누구나 당연히 해야 할 인간으로서의 의무이자 가치다. 하지만 특별한 동기 없이 스스로 반성하기는 매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쉽게 반성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반성과 상반된 개념에 대해 여러 관점의 이야기가 있을 수 있으나 인간 행위를 수평선 위의 ‘0’ 점을 기준으로 비유해 본다면 반성은 ‘-‘의 개념일 것이고, 그 반대는 ‘+’의 행위이다. 이 '+'의 행위는 진행이나 좀 더 확장해서 진보의 개념으로도 해석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목적 지향점을 두고 진행하는 상황이라면 반성은 그 진행을 더디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반성이 없는 진행이나 진보는 어쩌면 진솔한 목적 달성을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 적인 움직임, 즉 반성이 없는 관계로 속도 조절에 실패하여 수평선을 떠나 매우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반성이 없는 진행이나 진보는 위험하기조차 하다. 특히 종교적 행위에 있어 절대자에게 오직 자신의 희망과 요구사항을 늘어놓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만을 간절하게 바라는 진행이나 진보는 수평선을 떠난 행위일 뿐만 아니라, 종교 본래의 목적과도 다른 오로지 개인적 욕망일 뿐이다. 이러한 상황을 사전에 막고 좀 더 참다운 종교적 행위를 위해 어느 종교이든 진솔한 자기반성을 절대자와의 소통에 있어 그 첫 번째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종교가 발생한 역사 이래 이 자명하고 단순한 논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을 보면 반성이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François-André Vincent(프랑소와 앙드레 빈센트, 1746 ~ 1816)는 프랑스의 화가이다. 1768년 로마 상의 부상으로 이탈리아에 간 그는 Jean-Honoré Fragonard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벽화를 로마의 Palais Mancini(만치니 궁)에 남겼다. 로마와 나폴리를 오가며 르네상스 예술을 호흡한 빈센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르네상스 화가는 바로 Raffaello Sanzio da Urbino(라파엘로)였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신화와 성경을 소재로 하여 자신 만의 독특한 해석을 가미한 그림을 그렸는데 역사 화파와 계몽주의, 그리고 엄격하지는 않지만 신고전주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그가 그린 “Der griechische Priester (그리스 수도사 )”는 그리스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는 신고전주의의 정신과, 인물의 묘사와 그림으로부터 역사 화파의 숨결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다.
머리 위에서 마치 신의 은총처럼 내려온 희미한 빛은, 수도사의 흰머리카락과 수염에 닿아 오히려 그의 흰 머리카락과 수염에 알 수 없는 생기를 부여한다. 깊고 굵게 패인 그의 이마 주름 속에는 곤고함 속에 반성을 통해 살아온 날들의 깊이가 숨어 있다. 여전히 윤기 있는 이마와 콧등으로 흐르는 유려함과 강건함은 반성을 통해 유지되는 그의 삶이 여전히 단단함을 말해준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향한 늙은 수도사의 모습에서 신을 섬기는 사도로서의 엄숙함과 인간으로서의 깊이를 동시에 읽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내려 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왠지 서글픔과 회한이 묻어나는 것도 사실이다. 눈 밑으로 거무스름하게 쳐져 있는 피부, 젊은 시절 붉게 빛났을 테지만 이제는 붉은빛을 잃은 굳게 다문 입술이, 빛의 영향으로 희미해지면서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그의 얼굴에서 읽히는 얇은 서글픔은, 이를테면 그의 삶에 대한 회한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부족한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반성과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깊이와 무게 등이 반성이라는 틀에 녹아들어 이러한 표정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의 어깨 위에 보이는 옷깃은 끝 부분이 닳아 오랜 세월 그와 함께 보내왔음을 보여주고 머리 위에 쓴 검은 모자의 끝도 빛의 반사에 얼핏 갈색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모자 또한 긴 세월 수도사의 머리 위에서 함께 했을 것이다. 이것은 수도사로서의 삶이 결코 녹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수도사의 삶보다 더 곤고했을 당시의 기층 민중의 삶까지도 추측하고 남음이 있다.
1782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당시의 계몽주의 사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로코코가 귀족들의 우아하고 화려한 삶을 반영한 것이었다면, 계몽주의는 로코코와는 달리 민중의 삶과 애환을 반영한 것으로서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한 사조이다. 그리스 수도사의 종교가 그리스 정교이든 아니면 가톨릭이든 또 아니면 개신교이든, 그것은 이 그림에서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늙은 수도사의 희미한 얼굴을 통해 18세기 말 유럽 기층 민중들의 곤고하고 굴곡진 삶을 보여주려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