靈的 空間에피어난 芙蓉
1. 靈的 空間
아름다움은 말이 없다. 말이 없음은 淡淡함이다. 동시에 담담함은 변증법적으로 다른 아름다움을 창조해 낸다. 회화적 공간은 언제나 담담하다. 담담함은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 얼마간의 깊이를 요구한다. 감각에만 의존하는 일상의 너머에 존재하는 특정 공간에서의 깊이는 조금 어두워지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다만 이 어두움은 빛의 반대쪽에 위치하는 광학적 어둠이라기보다는 沈潛에서 유래된 조밀함의 무게에서 느껴지는 것일 뿐, 모든 것의 형태와 그 경계면은 또렷하고 심지어 그 경계로부터 반사되는 질감과 양감조차도 확연하다. 하지만 분명히 '밝다'라고 표현되지는 않는다.
작가는이 공간에 홀로 있으면서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때론 파기하고 생략한다. 視覺에 의존하여 수집했던 모든 정보를 이 공간으로 가지고 온 작가는, 먼저 그 정보에서 필요 없는 부분을 버리고 그다음으로 이미 이 공간(영적 공간)에 이미 저장되어 있거나 혹은 자신의靈的 磁氣場 범위 내에 흩어져 있던 것들을 부가시키게 된다.
영적 공간은 매우 넓기는 하지만 제한 없는 공간은 아니다. 그렇다고 오로지 우리 사유의 공간에만 존재하여 감각에 의하여 把持할 수 없는 상상의 공간도 아니다. 이 공간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정지되어 있어서 찰나와 영원함은 동일한 사태가 되기도 한다. 시간으로부터 제한받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은 늘 새롭고 말랑말랑한 연질의 감각이기도 하고, 동시에 모든 것은 딱딱하게 굳어 더 이상 유용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등 모든 창조적 행위를 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영적 공간이 존재하고 그 공간의 넓이와 깊이는 그의 창조물들과 분명한 함수 관계를 가지게 된다.
2. 繪畵的 표현
회화적 표현은 앞서 말한 작가 자신의 영적 공간에서 치열한 내부적 혼돈 끝에 마침내 발현된 작가 자신의 의지이다. 이 의지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작가 개인이 가진 지식과 경험을 기초로 한다. 여기에 부가하여 미미하지만 작가의 공간적 위치가 작용하게 되고 이 공간적 위치는 일반화하기는 어려운 모호한 외부요인들이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면서 하나로 틀로 형성된 것들이다.
이렇게 형성된 틀들은 사실 끊임없이 진화한다. 진화의 자양분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자질로부터 출발하여 외부적 자극, 이를테면 작가의 호흡처럼 사소하거나 작가의 철학적 의지처럼 중요한 것들에 의해 영향받게 된다. 그러한 자극은 회화에서 선으로 또는 면으로 그렇지 않으면 색채의 선택으로 나타나거나 혹은 시각으로 확인되지 않는 느낌으로 작품에 스미게 된다.
영적 공간에서 형성된 작가의 의지는 회화적 표현이라는 수단을 통해 지각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을 창조한다. 영적 공간에서 완성된 작가의 의지는 이 물리적 공간에서 시각화되어 실존의 세계에 공개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번 작가는 다양한 물리적 자극에 노출되는데 세부적으로는 종이, 또는 캔버스의 재질로부터 색채의 강도와 깊이 등에 이르기까지 미세한 것들 모두가 작가의 의지와 미묘한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마침내 영적 공간에서 형성한 작가의 의지는 실존의 세계에서 ‘연꽃’으로 묘사되었다. 연꽃이라는 실존의 객체가 작가에게 부여한 복잡하고 다양한 자양분들이 작가의 영적 공간에서 다양한 의지와 결합하고 그것이 또 다른 변화의 과정을 거쳐 드디어 도달한 물리적 공간에서 客體化된 순간, 시각적 관찰자인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서 형성된 스스로의 의지를 개입시켜 대상을 관찰한다. 물론 작가와 일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물론 작가가 묘사해 놓은 회화적 표현의 구석구석에 배치된 작가의 영적 공간에서의 철학적 감각이 부분적으로 감지되어 관찰자에게 영향을 주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관찰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에 따라 객체화된 대상물을 해석한다.
3. 해석
먼저 형태와 구성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며 독자적인(작가와의 어떤 의견 교환도 없는) 해석이다. 그림의 오른쪽 아랫부분의 연꽃 줄기로부터 그림의 왼쪽 윗부분의 연꽃잎과 배경이 만나는 부분까지 대각선으로 그림을 관찰하고 동시에 畵題인 ‘하늘 산책’을 감안해 보면 이 그림은 실체적 사물의 反影에 가깝다. 이것을 한 층 더 가능성 있게 만드는 것이 그림 전체의 채색이다. 단일한 色調가 가지는 심도를 강조하는 작가의 내면은 典型에 가깝다. 일반적으로 전형이란 특수함 속에서 일반을 표현하는 회화적 방법인데 작가의 내면에서 작가의 관념과 의지, 그리고 다양한 자극에 용해된 시각적 정보는 마침내 단 색조가 가지는 심도를 선택하였고, 그것을 종이 위에 표현해 낸 것이다.
작가의 내면에 도사린 각종 욕구와 사물에 대한 반응, 그로부터 형성된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의 층위는 화면 오른쪽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연꽃 줄기에서 객체화되고 그 줄기가 뿌리내린 곳의 어둠은 앞서 이야기한 광학적 어둠이라기보다는 조밀함에서 오는 상대적 어둠일 것이다. 그림의 下邊에 존재하는 벌레 먹은 듯 보이는 잎들과 연꽃이 뿌리를 내린 甘湯에 대한 표현은 작가 자신이 자각하는 자신의 모습에 가까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이 백색으로 표현된 연꽃 봉우리가 숨어있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 아닌 감각의 반응으로 보이는 단순한 희망일 수도 있다.
화면의 중간에 배치된 만개한 연꽃과 이미 잎이 떨어진 연밥, 그리고 피고 있는 꽃들 그리고 그 위로 배치된 넓은 잎은 작가 자신이 구성한 완벽한 세계일 것이다. 작가 자신이 쌓아 온 신념체계와 교육, 그리고 다양한 선택적 경험과 불가역적 환경에서 비롯된 세계관이 융해되어 각 사물의 거리와 크기, 색조와 심도를 조정하여 마침내 시각화한 것이다.
그 옆으로 배경만이 존재하는 공간이 있다. 당연히 이 공간 역시도 작가의 치열한 의지의 조정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작가 스스로 문득 과도한 사물의 배치에서 오는 피로감의 일시적 조정이거나 아니면 작가의 영적 공간의 회화적 또는 현실적 반영으로서 ‘비움’ 일 수도 있다.
다음으로 색채에 대한 이야기이다. 괴테에 의하면 색채 현상들을 지배하는 원리는 양극성의 원리, 상승의 원리, 총체성의 원리가 있는데 양극성과 상승의 원리는 노년의 괴테에게 있어서는 색채 현상뿐 아니라,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의 삶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원리로 인식되고 있다.(괴테 말년의 대표작 파우스트에서 이 원리가 잘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총체성이라는 것도 앞의 두 원리가 구체적인 현상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양극성은 가장 쉽게 관찰할 수 있는 자연의 원리이다. 빛과 암흑이 함께 작용하면, 어느 쪽의 활동이 우세한가에 따라 색채는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대립은 플러스(+)와 마이너스(-)라는 기호로 간단하게 표기할 수 있다. 즉 플러스에 속하는 것은 황색, 작용, 빛, 밝음, 강함, 따뜻함, 가까움, 밀침, 산과 같은 것이며, 마이너스에 속하는 것은 청색, 탈취, 암흑, 어두움, 약함, 차가움, 멈, 끌어당김, 알칼리와 같은 것이다. (괴테 색채론 참조)
따라서 괴테에 의하면 황색은 플러스인 감각의 최 상층에 자리 잡고 있는 색채다. 작가 스스로 의도했던 또는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이 그림의 가장 강렬한 부분은 황색과 백색으로 모든 것이 표현된 점이다. 그것은 작가의 영적 공간에 존재하는 기존의 모든 감각이 그것을 의지했고 그것에 작가는 순응했을 것이다. 물론 상당 부분 주변부의 영향이나 자극도 있었을 것이지만 작가 개인의 색채 선택의 의지는 완전히 독립적 의지의 소산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채색을 줄인 이 그림의 전체적 느낌은 오히려 강렬함이다. 이상하게도 이러한 강렬함은 다양한 채색의 그림보다 훨씬 오래 우리 머리 속에 잔상을 남긴다. 이것 역시 작가의 의도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