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begleitete Cello-Suite

Johann Sebastian Bach

by 김준식

겨울이 깊어진다. 한 없는 중력은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노루 꼬리만큼씩 낮이 짧아지더니 이제는 오후 5시만 넘어도 어둑해진다. 하여 더욱 밑으로 내려앉는 의식을 본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독일 아이제나흐 출신이다. 아이제나흐는 인구 5만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다. 이 유서 깊은 도시에서 바흐의 집안은 200년 이상 거의 50명이 넘는 음악가를 배출해 온 명문 집안이었다. 바흐는 위대한 음악가였지만 그의 사후 얼마간은 그저 그런 바로크 음악가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50년 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Johann Nikolaus Forkel)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을 발표하면서부터 전 유럽에 바흐 광풍이 불었으며 대중들의 바흐에 대한 재인식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는 평생 독일을 떠난 적이 없었다.(헨델에 비해) 그리고 자신의 직분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음악적 성취 또한 스스로 만족하였고 귀족과 왕들의 도움으로 경제적으로도 편안한 삶이었다. 그런 그가 이 첼로 음악을 작곡했다는 것은 약간 의외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이 음악 전체에 첼로의 슬픔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여섯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제1번 사장조 BWV 1007. 전주곡, 알르망드, 사라반드, 미뉴에트, 지그.


파블로 카잘스 버전으로 이 음악을 듣는다. 첼로 현을 왕복하는 활의 섬유 한 가닥 한 가닥과 그 음률의 변화가 육화 되어 심장과 폐부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음악은 한 없이 부드럽고 유려하다. 전주곡을 넘어서면 알라망드(춤곡) 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첼로가 가진 악기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듯)조용하고 동시에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바흐의 첼로 음악에 정통했던 스페인 출신의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는 보우잉을 천천히 함으로써 연주시간이 조금 길고 라트비아 출신의 위대한 첼리스트 마이스키(Miša Maiskis,1948~)는 그 부분을 줄여서 연주시간이 조금 짧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카잘스의 깊이를 더 좋아한다. 그렇다고 마이스키 버전이 경망스럽다거나 또는 지나치게 짧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호흡의 문제처럼 기계적으로 느낄 수 없는 순간과 순간의 문제다.


제2번 d단조 BWV 1008.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미뉴에트.


유려한 보우잉으로 시작되는 2번의 서주는 애절함을 더하게 하거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하지만 결코 그런 추락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장치를 곳곳에 만들어 놓은 바흐. 더블 스탑(두 현을 동시에 연주하는 기법)으로 격정을 보이다가도 이내 간결하게 이어지는 음률의 변화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 이리라.


어떤 겨울날 눈이 내린 날, 이 2번 전주를 들으면 나는 내린 눈보다 이 음악이 더 경이롭다. 알라망드에 이르러서는 슬픔의 불협화음에 집중한다. 어쩌면 슬픔의 본질에 대한 바흐의 생각은 불협화음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협화음조차도 아름답다. 빠르고 느린 반복으로 때론 침잠하다가 때론 가벼움으로 이어지는 오르내림은 포지션이 없는 첼로라는 현악기가 가지는 자유로움인지도 모르겠다.


제3번 C장조 BWV 1009.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부레, 지그.


정점에서 최저점으로, 다시 최저점에서 정점으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첼로 현을 따라 우리의 삶은 이어진다. 1번의 주제를 약간 반복하는 것은 음악의 일관성, 바흐 시대 음악의 의무이었을 것이고 뒤 따라 나오는 불협화음들은 바흐에게 미미하게 존재했던 시대와의 불화가 아니었을까?


빠르지 않게 이어지는 첼로 음은 협곡을 건너고 때로 평원을 지나 다시 가파른 고갯길에서 느끼는 가쁜 호흡까지 여행자의 행보를 닮았다.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 삶의 여행은 사라반드에서 좌절을, 부레에서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제4번 E♭장조 BWV 1010.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부레, 지그.


저음의 절망을 느껴보라. 절망은 절망을 부른다. 절망은 라르고 혹은 아다지오처럼 느리고 부드럽다. 하지만 절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다. 희망의 끝은 새싹처럼 여리기 때문에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다시 이어지는 몇 개의 좌절이 끝난 뒤 이제 제법 푸르게 자란 희망의 푸른 잎사귀에 몸을 맡긴다.


디미누엔도 되는 소리의 뒤에 무성한 희망의 잎들을 본다. 다시 정형화된사라반드가 이어지고 지그로 정돈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제5번 c단조 BWV 1011.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가보트 지그.


전체 음악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난해한 부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데카르트 기치처럼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중세의 바탕 위에 신과 인간, 그리고 음악과 가치의 세계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결되거나 혹은 경계를 가진다.


아름다운 것은 그 이후의 문제지만 아름다움은 역으로 그 모든 것을 승화시켜 버린다. 승화된 아름다움은 다시 신에게로 봉헌된다. 이 모든 것이 나와 음악사이에 놓여 있다. 나는 음악을 듣고 이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음악을 통하여 나에게로 스며든다.



제6번 D장조 BWV 1012. 전주곡, 알르망드, 사라반드, 가보트, 뮈제트, 지그.


파르티타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서주부터 전체를 아우르는 음악적 기교를 본다. 장엄하고 부드러운, 혹은 예리하고 둔탁한, 때로는 정교 하거나 때로는 혼란스러운 모든 부분이 나열되었다가 동시에 뭉쳐지기도 한다.


youtube애는 카잘스 버전이 보이지 않아 할 수 없이 마이스키 버전을 올린다.


https://youtu.be/mGQLXRTl3Z0


바탕 그림은 플랑드르의 화가 Samuel van Hoogstraten의 Adoration of the Shepherds, 58.2 x 70.8 cm, 164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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