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처럼 차가운 남북관계를 깨고 오늘, 2년 만에 드디어 남북이 만났다. 통일의 꿈을 단 한 순간도 놓은 적이 없지만 지극히 개인의 자격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잊지 않고 부르게 하는 일이나 통일이 우리 겨레의 가장 큰 과업이라는 다소 몽상적인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이었다. 통일이 참으로 멀게만 느껴지던 지난 정부의 10년 동안 북한은 핵무기 개발로, 미사일 개발로 바빴고 우리 정부는 사익을 위해 나라를 온통 파헤치고, 또 특정인들이 국가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남북한 모두 민중을 위한 정책과 통일을 위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권력자 자신들과 그 주변부를 위해 국력을 쏟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 비록 평창 동계 올림픽이 전제조건이기는 하지만 남북은 만났다. 부디 오래오래 이 분위기가 지속되어 통일의 기운이 한반도를 감싸 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십 수년 전쯤, 남북은 금강산 관광을 할 만큼 화해무드였고 그 짧은 틈 사이로 운 좋게 금강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시절도 금강산 깊숙이는 가보지 못했다. 금강산은 일만 이천 봉마다 전설이 있다. 그 전설의 대부분은 거의 불교와 관계된 것이 많은데 그 이유는 금강산이 워낙 예로부터 유명한 명산이라 신라 시대 이후로 많은 사찰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금강산 봉우리를 묘사한 조선 시대 시인묵객들은 참으로 많다. 그중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의 그림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골골 마다 암자와 단애마다 새긴 부처의 모습, 기묘한 암석과 계곡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려 놓은 두 사람의 작품을 보면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마치 그곳을 실제로 보는 듯 생생하다.
이 그림의 이름은 ‘묘길상도(妙吉祥圖)’인데 깎아지른 자연 바위 암벽에 부처를 부조해 놓은 것이다. 이런 부처를 일반적으로 마애불(磨崖佛)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자세히 부처의 얼굴을 보니 부처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못한 얼굴이다. 본래 부처의 얼굴은 32상 80종호의 원칙으로 그려진다. 32상으로 불상이 모습이 정형화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불멸 후 부처의 신격화가 그 주요 원인이고 또 다른 원인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미술로 정착된 불상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전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32상을 모두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눈동자가 검푸르다거나, 속눈썹이 소와 같이 길다거나, 백호가 났다거나, 눈썹이 초승달 같고 입술은 얇고 붉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인데 요즘 미인의 기준과 비슷하기도 한 것 같다.
그런 기준으로 보자면 이 그림의 부처 얼굴을 확실이 우리가 알고 있는 부처는 아니다. 그리고 手印을 보니 전법륜인(轉法輪印 dharma-chakra-mudra)이다. 이 수인은 부처가 無憂樹아래에서 처음 깨달음을 얻었는데(이때 手印은 降魔觸地印이다.) 그 내용을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설법할 때 지어 보인 수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수인이다. 이 마애불이 조성된 시기가 고려 시대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시대는 이 땅의 민중들이 역사의 어느 시기에서보다 더 가혹한 고통을 받았던 시기였다.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부처의 처음 설법을 떠 올리고 얼굴은 당시 이 땅의 사람 모습으로 만들어 험한 시절을 종교의 힘으로 고난을 이겨내려 했을 것이다.
단원의 그림은 매우 훼손되어 그림의 느낌만 살아 있다. 거대한 마애불 밑으로 갓 쓴 사람과 종자가 보이는데 마애불 앞에는 작은 전각식 석등이 보인다. 단원이 살았던 그 시절 종자를 데리고 금강산 유람을 다닐 정도의 양반이라면 아마도 권력의 주변에 있던 존재였을 것이다. 당시 이들이 보는 이 거대한 마애불은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양반에게는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저 신기한 장소 정도의 의미를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 양반은 틀림없이 고려 시대 이 불상을 조성한 민중의 고통이나 피맺힌 염원은 단 한 조각도 떠올리지도 못한 채 일생을 보냈을지 모른다. 그런 일은 21세기 이 나라에서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될 공산이 매우 크다.
실제로 이 그림의 장소는 내금강 깊숙하게 자리 잡고 있어, 어쩌면 지금 남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여기를 실제로 가 본 사람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기억이 희미해진 노년의 사람들일 것이니 지금 이 장소가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조차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妙吉祥이라는 말은 신묘한 기운이 서리어 모든 일이 잘 되도록 좋은 기운이 뻗어 나오는 곳이라고 풀이될 수 있겠다.
吉祥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선비 사(士)와 입구(口)가 합친 글자인데, 선비란(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조의 선비는 아니다. 중국의 상고시대 이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특정 계급들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예로부터 선한 존재로 여겨졌고, 그들이 하는 말은 복의 원인이라 생각한 것으로부터 출발한 글자이다. 상스러울 상(祥)도 양양(羊)과 보일 시(示)가 합쳐져 있는데 예로부터 양은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으로 좋고 아름다운 동물의 상징이었다. 그 양이 눈으로 보이니 좋은 일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吉祥 앞에 묘(妙)는 부처의 신묘한 경지를 말함이니 불교가 전래된 이후 이 땅의 민중들의 소원은 그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이 부처의 加被를 받아 자신과 이웃에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랬을 것이다. 하기야 저 벽에 새겨진 돌부처가 뭘 얼마나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단지 저 절벽에 부처를 새긴 그 엄청난 노력과 열정이 어쩌면 당시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주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더불어 2018년 오늘, 당시의 기운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 기운으로 오늘 만난 일과 다음에 만날 일들이 순조롭게 풀리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림은 金弘道 筆 金剛山畵帖에 있는 그림이다. 조선 후기의 화가 김홍도(金弘道, 1745~1806)가 정조의 명을 받아 1788년(정조 12년) 우리나라의 금강산 및 관동팔경 지역을 직접 유람하며 그린 60폭의 실경 산수화를 모아놓은 화첩 중 제17번째 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