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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Mar 17. 2018

주말 아침에 듣는 음악

나에게 있어, 봄으로부터 불투명이라는 이미지를 제거하기란 쉽지 않다. 도대체 이 불투명이라는 것의 淵源(연원)은 어디로부터 왔을까?  


'투명함'을 앞으로의 움직임이나 미래의 전망 등이 예측할 수 있게 분명하다는 뜻으로 파악한다면, 이 투명함의 대척점에 서 있는 말, '불투명'은 애매모호나 불확실로 이해될 수 있다. 


애매하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본다면 어둑어둑한 새벽녘, 형체의 구분이 어려운 그 시간대를 칭함이고 모호함이란 죽처럼 모양을 정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불확실도 비슷한 말로서 무엇인지 단언하기 곤란한 경우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단어들을 봄의 이미지에 적용해보면 ‘봄’은 앞으로의 변화에 대한 기대는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 ‘봄’이나 영어의 ‘Spring’ 독일어 ‘Frühling’이 가지고 있는 문자 자체의 의미는 ‘새로움’ 또는 ‘한 해의 앞’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따라서 앞서 말한 애매모호함 등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봄’과 불투명을 결합시킨 것은 단지 내가 보내왔던 ‘봄’이, 그리고 내가 겪었던 ‘봄’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러한 분위기에 지나온 나의 삶을 구겨 넣어 억지로, 혹은 애써 불투명하고자 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나만 그랬다면 좀 억울하지 않은가! 독일 출신의 Robert Schumann(슈만, 1810-1856)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그는 정신적인 문제로 일생 동안 고통을 겪었고 또 그 이유로 50도 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가 남긴 교향곡 ‘봄’ 은 전혀 ‘봄’ 같지 않은데, 아마도 그가 보내고 겪었던 ‘봄’이 그러했던 모양이다. 이 음악 ‘봄’도 사실은 ‘봄’ 같지 않다.


https://www.youtube.com/watch?v=abrie8X9s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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