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니 신록이 가득하다. 여린 잎의 녹색은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벅찬 감동을 준다. 지극히 개인적이기는 하지만 5월을 넘기고 많이 자란 잎들은 지금의 녹색보다 훨씬 짙고 무성하지만 지금의 감동보다는 덜하다. 여리고 어린것이 주는 감동은 식물이나 동물, 특히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하다. 아이들이 예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유독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름다워지기는 어렵다. 망가지는 외모만큼이나 내부적인 것도 혼탁해지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들로부터 감동을 받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수 백 년 된 노 거수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새싹과 꽃을 피워낸다. 하여 아름답고 위대해 보인다. 하지만 사람은 나이 들면 들수록 타인에게 아름다움을 주기가 어려워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아름답게 나이 든 사람은 드물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 이래서 어려운 것이다.
외부의 아름다움은 내부로부터 유래된다는 것은 아주 오래된 명제이다. 미학의 본질 이를테면 감성적인 체계로부터 이성적인 체계로 나아가는 것 또한 이 명제로부터 출발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참으로 다양한 의견들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인간의 시선에 상응하는 대상(그것이 유형이든 또는 무형이든 간에)에 종속한다.
아름다움을 한자로 쓰면 美로 쓴다. 양 양(羊) 아래에 큰 대(大)를 놓은 것이다. 즉 큰 양이라는 뜻이다. 양은 예로부터 제사의 제물로, 음식으로는 육효(여섯 가지 고기반찬) 중의 으뜸이었기 때문에 큰 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할 만하다. 물론 맛을 최고로 하여 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 문제가 있다. 양 양(羊)이 들어간 한자 중에 옳을 의(義)가 있다. 나 위에 양을 놓은 형상인데 이는 내가 하늘에 양으로 제사를 올린다는 뜻이니(희생, 봉사, 비움), 그것이 옳은 일이며 그것이 곧 의로운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한자의 미(美)와 의(義)는 글자의 의미로 볼 때 양을 매개로 하지만 그 양은 음식이나 제사상의 제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서의 매우 큰 가치를 말함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이나 의로움은 우리가 일생 동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삶의 지향점이 되었을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나이가 들면서 희생과 봉사와 비움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문이 든다. 아이들은 그 자체로 벌써 엄청난 아름다움을 우리들에게 주기 때문에(존재 자체가 봉사요 기부다.) 별 다른 희생이나 봉사가 필요하지 않다. 나이 든 사람들은 애써 그 일(희생, 봉사)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아름다워 지기는 어렵다는 뜻이 된다. 4월의 산에서 스스로를 돌아본다. 점점 나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에서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을 아쉬워한다.
산길을 걸으면서 주섬주섬 주워 올린 것이다.
春日
葉間日照漫 (엽간일조만) 잎 사이로 햇살 퍼지고
林中風按木 (임중풍안목) 바람은 숲 사이로 나무 어루만지는구나.
茫天山上垂 (망천산상수) 아득한 하늘 산 위에 드리우고,
自咏夊隨路 (자영쇠수로) 혼자 읊으며 길 따라 천천히 걷네.
風嘯灑梢林 (풍소쇄초림) 숲 위로 바람은 휘파람 소리 내며 불고,
松間枠花雰 (송간화화분) 소나무 사이 벚나무 꽃잎 흩날리니,
新綠崗漸甚 (신록강점심) 산허리 새순들은 갈수록 짙어지겠구나.
諸鳥造巢忙 (제조조소망) 새들은 집 짓느라 바쁜데,
盈綠位流春*(영록위류춘) 봄이 지나간 자리엔 가득한 푸름,
惜錄址過歲*(석록지과세) 세월 지나간 자리엔 안타까운 흔적,
來春同花開 (래춘동화개) 내년 봄 저 꽃들 다시 피겠지만,
乃節乎異春 (내절호이춘) 돌아온 봄, 아! 그 봄은 아니겠지.
** 두보의 시 可惜洛花(가석낙화) 꽃이 짐을 슬퍼함 중, 花飛有底急(화비유저급) 老去願春遲(노거원춘지) 무슨 일 급하기에 꽃은 이리도 빨리 지나, 늙어가는 몸 봄이 더디 가기를 원하건만, 의미를 용사함.
https://www.youtube.com/watch?v=MD-aR7qkg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