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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Jun 09. 2018

Prometheus(2012)

왜 우리를 창조했나요?

1. 프롤로그 


16세기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1546 ~ 1601)가 맨 눈으로 관찰했던 저 광대무변의 우주의 밤이 오늘도 다시 나에게 다가왔다.  2012년 상영된 영화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해 본다.

창조의 정보

빛은 매우 빠르다. 일초에 30만 km를 가는데 그 빛이 일 년을 가면 자그마치 약 9조 4천5백억 km를 간다. 그것이 1광년이다. 영화 초입, 지구로부터 330조 km 거리에 있는 우주선 프로메테우스를 보여주는데 이는 대략 지구로부터 40광년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까지의 통설로 되어있는 우주의 반지름(우주를 구형으로 가정했을 때)인 137억 광년을 생각해 보면 이 거리는 너무나 작아 아직도 지구가 포함된 은하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 신은 누구로부터 창조되었을까? 성경에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설명하지만 신앙인이 아닌 보통의 우리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논리적 타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 어쨌거나 그 조물주에 대한 인간들의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고대 문명의 미스터리를 인류기원 외계인 설로 연결시킨 영화적 수사는 진지한 면은 없지 않았으나 구조나 타당성이 매우 허약하다.  


하기야 그 많은 고대 문명에 포함된 외계인 이야기를 모두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불확실하고 허약한 근거를 바탕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인류기원을 탐구하기 위해 우주여행을, 그것도 지구로부터 40광년 떨어진 곳으로 여행한다는 설정은 아무래도 어설프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설정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영화 제목 Prometheu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티탄 신족이자, 동시에 그 어떤 신보다도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신으로 유명하다. 이름 Prometheus는 접두사인 'Pro-(먼저, 앞서)'가 붙어 먼저 생각하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즉 예언자 혹은 전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라는 뜻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반면 그의 동생은 Epimetheus인데  이름의 뜻은 그리스어로 나중에 생각하는 자이다. 'Epi-(나중, 이후)'라는 접두어이다.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되는 판도라의 상자를 아무 생각 없이 열어재껴 인류를 혼란스럽게 만든 장본인이다. 머리는 장식인 존재가 바로 에피메테우스이다. 어쨌거나 프로메테우스는 대지의 신 가이아를 제외한다면 '완벽한' 예지능력이 있는 유일한 신이다. 세상 모든 것을 지켜본 가이아의 속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신의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차용한 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크게 영향력은 없어 보이지만 뭔가 상징적인 의미는 있어 보인다. 

안드로이드 데이비드

안드로이드(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인간)인 데이비드(마이클 패스벤더 분)의 대사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일 수 있다. “인간들은 왜 우리를 만들었나요?” 만약에 조물주가 인간을 창조했다고 가정하고 우리가 그를 만났다면 조물주에게 물어볼 첫 번째 질문이 아마 이것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에서 데이비드는 인간에 대한 냉소와 동시에 인간의 저급한 속성을 그대로 가지는 것으로 표현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목이 떨어진 상태에서조차도 주인공 쇼(누미 라파스 분)에게 연락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알려 자신을 정상으로 복구하려는 처절한 노력을 보면서, 인간 군상들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애착과 너무나 많이 닮아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인공 쇼

주인공 엘리자베스 쇼는 에일리언의 리플리(시고니 위버)와 별 차이 없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에일리언을 본 사람이라면 주인공의 역할에 그 어떤 신선함도 느낄 수 없다. 배속에 외계생명 설정조차 너무 비슷해서 에일리언 속편을 보는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영화는 에일리언의 프리퀄 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적 공간 내부에서 시간 배경은 이 영화가 에일리언보다 더 과거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인류기원을 밝히기 위해 우주를 향한 그녀의 노력은 허망하게 무너지는데 이것은 사실, 관객들이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이었고 과연 그녀가 그 과정에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혼자 살아남아, 에이리언의 ‘리플리’ 대사와 별 반 차이가 없는 인류의 창조자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나겠다는 말로 영화를 끝내고 있다. 인류의 기원을 찾아 다시 여행을 떠나는 설정은 리들리 스콧 감독 자신이 인류 창조에 대한 의문이 계속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2. 창조와 멸망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자신들이 창조한(정확하게는 복제한) 인류를 다시 멸망시키려 하는데 영화 안에서 창조자가 태도를 바꿔 인류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이유를 꼭 찾아낸다면 그것은 아마 억만장자이며 이 우주여행을 기획한 피터 웨이랜드(가이 피어스 분)로 대표되는 인간들의 끝없는 욕망에 대한 저주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인류 보편이다. 이 보편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반드시 죽게 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억만장자 웨이랜드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자해 광막한 우주에서 인류를 창조한 이들을 찾았지만 거기가 그의 무덤이 되고 마는 아이러니를 겪게 된다. 예상 가능한 결말이지만 그 예상을 감독은 영화적 수사로 풀어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를 피력한다. 리들리 스콧이라는 감독이 가지는 명성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런 영화에서 언제나 등장하는 여러 종류의 인간들에 대한 묘사는 매우 정형적이어서 진부한 느낌을 준다. 인종의 다양함은 있었지만 성격유형은 의외로 단순하다. 지나친 불안과 공포, 불필요한 만용으로 죽음을 자초하는 인간형과 반대로 의외로 담담하고 이유 없는 정의감이 충만한 인간형이 그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그 이유 없는 정의감이 인류를 살리지만 정확하게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문득 그것이 인간이 창조된 원인이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3. 미장센 

기괴한 이미지

리들리 스콧의 미래관은 확연히 디스토피아 적이다. ‘에이리언’, ‘블레이드 러너’ 등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 영화의 미장센 역시 디스토피아적 음울함이 묻어난다. 21세기 후반부의 뛰어난 과학기술로 창조된 각종 기계와 장비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왔던 미래가 무대인 SF영화와는 달리 어떤 화려함도 없다. 인조인간 데이비드의 알 수 없는 우울한 표정과 배우들의 무표정과 불안함에서 우리는 희망의 미래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외계에서 발견한 거대한 얼굴상은 이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티탄족(거인족) ‘프로메테우스’를 연상하게 하는데 그 역시 어두운 조명으로 기괴하고 암울하다.  

비커스

우주선 프로메테우스의 총지휘자를 연기하고 있는 샤를리즈 테론(비커스 역)은 영화 내내 이렇다 할 역할 없이 우주선 안을 서성이다 끝내 허망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배우 샤를리즈 테론도 아깝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의 역할은 더욱더 안타깝다.  


우주괴물의 동일한 포맷 역시 이제는 너무 진부하다. 두족류를 상상하게 하는 형태부터 에이리언의 괴물까지 더 이상 새로운 괴물은 없어 보인다. 아이디어가 필요한 것인지 아니면 애당초 이런 괴물로부터 우리가 진화했는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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