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생각

by 김준식

2학년 1반 담임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약 60여 명의 교사들이 있다. 교사 집단이 대체로 그러하듯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더러는 석 박사 학위도 있는 대단히 고 학력의 집단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학 학사 이상의 학력이 딱히 필요하지는 않지만 승진이나 기타 호봉 산정에 유리한 탓에 많은 선생님들이 석사 학위를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사가 정작 어려움을 겪는 것은 지식의 문제는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학생들의 삶과 연결되는 문제들이다. 이를테면 심리적인 문제로부터 기초하는 태도와 행동의 문제, 그리고 사회적 상호작용의 문제에 기초하는 행동과 태도의 갈등 들이다.


60여 명의 선생님들이 이러한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각인각색이다. 다양함이 나쁘지는 않지만 일정한 기준조차 찾기 어렵다. 물론 학교에는 수많은 규칙들이 있다. 하지만 교육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을 규칙에 의해 처리할 수는 없다. 아니 거의 규칙 이전의 문제이거나 또는 그 범위를 넘는 인간 내면의 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경우가 더 많다. 교육이 어렵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2018년과 같이 올해도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이다. 23명의 아이들을 지난주 한 명씩 상담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막막함이었다. 아마도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나와 정확하게 40년 차이가 나는 이 아이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교사로서 대단히 실존적인 고민이 그 원인이라면 원인일 것인데 막막함 뒤에 도사린 답답함과 무기력이 두렵기조차 하다.


개인적으로 30년 이상의 교직 경력, 다양한 지식, 학위 등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이들과 상담에서 그들에게 교사로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나아가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주말 내내 나를 지그시 누르고 있지만 특별한 대책조차 없다는 것이 막막함을 더 가중시키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아이들에게 특별한 영향을 주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 주어서도 안 되는 것이 교사로서 바른 태도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영향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교육행위를 해 왔기 때문에 이것이 옳은 방법적 고민일 것이라는 스스로의 확신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영향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조금 가벼워지지만 교사로서 직업적 의무감 혹은 의미가 희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진퇴가 모두 어렵다.


23명의 아이 중 한 명은 일주일 내내 종례를 하지 않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특별한 고지도 없이 교실에서 사라진다. 어제는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끊고 다시 받지 않는다. 만난 지 일주일 만에 거대한 벽을 만든 그 아이와 월요일 아침에 만날 것이다. 나는 벽을 넘어 그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여야 하는가? 그 어떤 폭력적인 방법도 그 아이에게 쓸 생각은 없다. 그렇게 해서 돌아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문득 성경의 돌아온 탕아(Parable of the Prodigal Son)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지만 누가복음에 나오는 돌아온 탕아의 전제조건은 탕아 자신의 회개가 먼저 있었다. 월요일 아침 그 아이가 지난 일주일 종례조차 하지 않고 금요일 오후에는 심지어 전화조차 끊은 것을 뉘우치며 학교에 올 것인가?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유인즉 1학년 상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 아이에게 현재의 학교와 담임인 나는 부조리 그 자체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60여 명의 교사들이 같이 80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금의 학교에서 나와 우리 반 아이와 같은 불편하고 생경한 일들이 약간의 온도 차이는 있지만 매일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


원인은 한 없이 다양하다. 앞서 말했듯이 60여 명의 교사의 의견이 모두 재 각각이고 800여 명의 학생이 재 각각이며 그들의 부모들,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가정과 사회가 다 제 각각이다. 산업화의 초창기(7~80년대)에는 대 부분의 가정과 사회가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일률적인 통제에 익숙했다. 옳고 그른 것은 당연히 논외다. 다만 그런 시대였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90년대와 2000년대를 넘어서면서 일률적 통제는 사라지고 다양성의 시대가 도래했다. 교육도 이런 변화에 적응해야 했지만 안타깝게도 교육이 가지는 속성(인간을 변화시키는 제도) 탓에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었다.


2019년, 공간과 시간, 그리고 문화의 격렬한 변화 속에서 학교는 굼뜬 움직임으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 현실적인 목표와 희망이 아직은 분명치 못한 아이들에게 여전히 직사각형인 학교 건물과 교실과 복도 그리고 창문, 역시 직사각형인 교훈과 급훈, 그리고 책상과 딱딱한 의자가 있다. 거기에 구태의연한 교과서와 오래된 나 같은 교사들이 버티고 있는 학교는 아이들에게 숨 막히는 장소일 수 있다.


월요일 나는 그 아이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