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2,631,770회
세슘-133 원자의 복사파가 1초에 진동하는 횟수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세슘-133 원자의 복사파가 9,192,631,770회 진동하는 시간을 1초로 삼은 것이다. 약 8천만 년 만에 1초 오차가 있는 원자시계 이야기다. 최근에는 스트론튬 원자를 이용하여 2억 년 동안 1초의 오차가 있는 시계를 개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간은 무한하고 동시에 유한하며 또 광대무변하기도 하고 매우 촘촘하여 그 틈이 없는 절대적이며 공간적인 하나의 사태(事態 – 영어 Situation, 독어 Alltagsdinge)이다. 지구에서 시간의 절대적 기준은 태양이다. 즉, 빛과 어둠이라는 현상이 인류에게 ‘시간’이라는 절대적 사태를 도출하게 하였고 인류 역사와 함께 그 개념은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에 어슬렁어슬렁 거리며 지내는 방법이 있다. 한자로 쓰면 소요(逍遙)가 된다. 사실 서양에서는 이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표현이 없다. 문화적인 차이라고 생각되지만 좀 더 깊게 관찰해보면 서양에서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생산적이 아닌 일이며 동시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Peripatetic school)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소요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가 지내던 건물인 Lyceum(리시움 – Lykeion : 리케이온)의 복도, 즉 Peripatoi(Colonnade – 복도, 회랑)를 따라 이동하며 철학적 논의를 하였다는 것의 의미가 일본 학자들에 의해 의역되면서 생긴 말이다. 이를테면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이런저런 철학적인 대화와 논의를 하였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어슬렁거리는(시간과는 무관하게 지내는 모습) 것이 아니라 다만 조금 천천히 걸으며 철학적 논의를 진행하는 모습, 즉 시간을 잘 활용하였던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한자 소요(逍遙)의 글자적 의미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즉 逍는 肖(닮을 초) + 辵(쉬엄쉬엄 갈 착)의 뜻이니 말 그대로 시간을 느릿하게 보내며 걷는 것이요, 遙는 䍃(질그릇 요) + 辵(쉬엄쉬엄 갈 착) 즉 무거운 질그릇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이다. 두 글자가 붙어 쉬엄쉬엄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처럼 일정한 대화를 나눈다거나 아니면 일정한 경로를 따라 걷는다는 의미를 소요에서는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소요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며 생각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로서 쉬엄쉬엄 걷는, 이를테면 시간을 넘어서 있는 경지를 의미할 수도 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소요는 이미 멀어졌다. 9,192,631,770회의 반복을 1초로 하는 너무나 정밀하고 엄격한 시간이라는 절대적 괴물 앞에 다만 적응하고 순종하며 살아갈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들이 리시움의 복도를 거닐면서 고민했던 그 수많은 철학적 명제와 논리들도, 그저 어슬렁어슬렁 쉬엄쉬엄 걸으며 여러 가지 생각들이 가능한 동양의 ‘소요’도 오늘날의 이 기막힌 정교함과 치밀함 앞에서는 무용하거나 동시에 무가치해지고 만다.
목요일 점심 후 따가운 태양 밑을 어슬렁거리지만 시간에 지배당하며 오늘을 사는 나를 문득 발견한다. 미세한 내 마음의 공간에서 절대 시간의 제약으로부터 최소한의 자유를 누리고자 소요하려 하지만 그 길은 멀기만 하다.
그림은 러시아 이동 전람파의 일원이었던 풍경화가 Ivan Shishkin의 겨울이다. 날씨가 더워지니 이런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