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사태에 대한 생각

by 김준식

영화 ‘기생충’

‘유시민과 홍준표의 대화’

두 개의 사태를 보며 떠 오른 생각


중국의 전국시대, 세상의 어지러움과 삶의 고단함은 맹가, 즉 맹자의 책 <맹자>에서도 충분히 보인다. 전쟁이 일상화되자 자식들은 더 이상 부모를 봉양하기 힘들어 부모는 추위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고 형제와 처자는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전쟁이 덜한 시기에 생업에 종사한다고 해도 이미 황폐해진 땅이며 사람 인심들 때문에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졌다. 따라서 평상시에도 餓死를 걱정할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동시대 <장자>의 현실인식은 더 절박하다. 전쟁 때문에 또는 직접적인 전쟁이 아니더라도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 시체들이 즐비하고 엄혹한 시절 권력에 의해 처형된 사람들은 널 부러져 있고, 아직 형틀에 얽매인 사람들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맞아 죽거나 굶어 죽은 사람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절망과 탄식의 세상이었다. 바로 亂世! 그 자체였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당대의 지식인들은 이 지난한 문제에 대한 답을 어떤 식이든 내놓아야 하는 마음의 부담을 지고 있었고 장자 또한 이러한 부담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


공자의 계승자였던 맹자는 이 난세를 끝낼 수 있는 것은 “오직 仁義뿐”이라고 말하고 인의를 위해서는 ‘捨生取義’의 大道를 가야 한다고 말한다. 묵가는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 나름대로의 실천규약을 정하여 유가의 탁상공론을 배격하고 전쟁에 대한 방어를 최선의 방책으로 삼아 어려운 시대를 견뎌낸다. 그래도 이 두 부류는 최소한의 義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그것을 위해 간혹 목숨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한비자를 시작으로 하는 법가의 상앙은 이들과는 다른 길을 걸으며 오직 정치적 야심을 위해 이 난세를 이용한다. 그는 왕이나 귀족의 개인적 의지가 아니라 제도에 의해 움직이는 분명하고 공리적인 정치를 꿈꿨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정치적 야망을 이루었으나 도와는 멀어졌다. 그리고 장자가 있다. 강대국(전국 7웅)들이 각축을 벌이던 시대, 작은 송나라의 하급관리였던 장자, 그의 선택은 무엇일까?


장자의 이미지는 먼저 고결함이다. 초 위왕의 재상이 되게 해 준다는 초청을 사양하고 고결한 모습을 보인다. 다른 이미지는 초월한 사람의 이미지다. 장자의 아내가 죽어 혜자가 문상을 갔을 때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는 그 이미지다. (장자 至樂) 삶과 죽음을 초월하여 슬픔 때문인지 아니면 기쁨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는 장자에 대한 이미지다. 또 장자는 매우 날카로운 지식인의 이미지도 있다. 즉, 진왕에게 수레 백대를 얻었다고 뽐내는 曹商(조상)에게 장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진왕은 종기 터뜨려 고름을 뺀 자에게 수레 한 대 주고, 치질을 핥아서 고치는 자에게 수레 다섯 대 준다고 하더군. 그대는 치질을 고쳤는가, 어찌 이리 수레를 많이 받았나”라고(장자 열어구) 지적한다. 신랄한 비판이다.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예리한 상황인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장자가 인식한 당시의 시대상황은 공자의 후계자였던 맹자가 인식한 시대상황과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바로 避人之士와 避世之士의 차이로 나타난다. 피인지사와 피세지사의 이야기는 논어에 등장한다.

장저와 걸익이 함께 밭을 갈고 있는데 공자가 자로에게 나루터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였다.

장저가 자로에게 물었다.

"수레 고삐를 잡고 있는 사람은 누구십니까?"

자로가 대답했다. "공자이십니다." 장저가 말했다.

"노나라 공자 말입니까?" 자로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장저가 말했다.

"그 사람은 나루터가 어디 있는지 알 것입니다." 자로가 걸익에게 다시 묻자 걸익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자로가 말했다.

"자로입니다." 걸익이 물었다.

"노나라 공자의 제자이십니까?"

자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걸익이 말했다.

"도도히 흘러가는 것, 천하가 모두 이러하니 누가 바꿀 수 있겠습니까? 당신도 나쁜 사람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보다는 세상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즉 자신들과 같이 세상을 등지라고 은근히 유도한다.)


여기서 난세를 살아가는 두 가지 유형의 지식이 범주화된다. 하나는 무도한 군주 곁을 한 치의 미련 없이 떠나 세상을 주유하고 있는 공자와 같은 避人之士! 의 길과 또 하나는 덕치를 실현할 군주를 찾아 헤매는 짓 따위를 하지 않고 은둔하여 사는 장저, 걸익과 같은 避世之士의 이미지다. 장자 자신은 이미 시궁창(汚瀆)에서 노닐겠다고 말한 사람이다. 세상이 아무리 한심하고 구질구질하고 역겹고 난감하더라도 그 세상을 피할 길은 없다. 진흙탕 속에서 진흙을 묻히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세속은 불가피한(“不得已 - 부득이”) 현실이다. 하여, 장자 ‘避世’를 버리고 세상과 마주한다. 세상을 피할 방법은 애당초 없다. 세속의 불가피함을 필연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장자는 공자를 수긍하는 쪽이다.


하지만 장자는 공자와는 분명한 선을 긋는다. 즉 공자의 말대로 세상이 無道한 게 정말 인의가 없어서인가? 오히려 탁상공론인 인의 때문에 세상이 더 무도해지는 것은 아닐까? 유가에서 공자가 말하는 군자는 빈천은 견뎌도 오욕은 견디지 못한다. 또 인의를 위해 목숨은 초개처럼 버려도 그 사소한 명분은 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군자다.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인의는 세울 수 없고 다만 명분 때문에)” 그런 의지 혹은 태도가 당시의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원인은 아닐까? 장자는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그의 생각을 출발시킨다.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이 몹시 어지럽다. 연일 죽고 죽이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이유는 수 천 수 만 가지가 넘지만 요약하면 전국시대와 다를 바 없다. 전국시대를 보는 장자의 생각처럼 명분을 위한 불필요한 전쟁이 그 원인이라면 지금은 자본을 지키기 위한 욕망의 전쟁이다. “내 것”으로 집약되는 지금의 세상에서 이 “내 것”이 없는 공허를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데, 그 참을 수 없음을 가중시키고 가속화시키는 것은 자본이며 그 자본의 뒤에는 항상 불편한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권력이 하는 불편한 일을 감추기 위해 사람들을 오직 “내 것”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자본은 이에 동의했고 그 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괴하고 절망하며 미치고 분노한다. 그 결과들이 지금의 세상 모습이다.


우리는 그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되돌려 놓아야 한다. 장자가 2300년 전 그의 이야기를 비유와 상징으로 이야기하며 노력했듯이 지금의 우리도 최선의 노력으로 저 불편한 권력과 자본을 향해 눈을 부릅떠야 한다.

유시민과 홍준표, 홍준표와 유시민 그들은 다른가? 아니면 같은가?


러시아 이동 전람파 Vasilij Perov(바실리 페로프) 그림 두 편을 소개한다. 밑에 있는 그림은 '관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고 바탕그림은 '수조 옆에 줄선 사람들' 우리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은 나만의 경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