曉中一瞬 (효중일순) 새벽 한 순간
昨夜夢中㑂臆見*(작야몽중방억견) 지난밤 꿈, 억견 속을 헤맸는데,
諸像著明連昢昧 (제상저명연불매) 희미한 새벽이 되자 모든 것이 밝아졌네.
鷦鷯巢不過一枝*(초료소불과일지) 뱁새가 집 짓는데 가지 하나면 되듯,
一生無所此景偕 (일생무소차경해) 이 경치와 함께라면 무엇이 필요하리.
2019년 10월 10일 새벽 사진. 12일 밤에 마침내 글을 쓴다. 요즘 꿈속이 흉흉하여 혼란스러웠는데 새벽 풍경을 보니 모든 것이 한순간 환해졌다. 하여 이 얼마나 고마운 새벽인가! 『장자』 제1편 소요유 제2장에 허유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허유가 요 임금의 부탁(나라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는 장면이다. 그 이야기 중 깊은 숲 속에 사는 뱁새(鷦鷯)에게 필요한 것은 큰 숲이 아니라 작은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나에게 있어 이 새벽 풍경은 그 작은 뱁새에게 필요 충분한 나뭇가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 Episteme라는 말이 있다. 에피스테메의 본래 의미는 'know how to do, understand' 즉 일의 처리 방향과 그 일의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푸코(Michel Foucault)는 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를 에피스테메라 칭했다. Episteme의 반대쪽에 Doxa라는 단어가 있다. 이 또한 꽤나 어려운 철학적 용어이기는 하지만 쉽게 그리고 일반적으로 풀이하자면 '근거가 박약한 지식'을 말한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의 플라톤으로부터 기인하는데 한자로 표현한 것이 臆見(억견)이다.
억견으로 쓰는 것이 정확한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2019년 세상의 풍경은 이 억견을 진리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臆이란 가슴이 답답한 상태를 뜻하는 한자이기 때문에 한자적인 뜻은 Doxa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내 지식의 범위가 Doxa의 범주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이 억견에 사로잡혀 근거도 없는 것들을 서로 진리라 우기고 심지어 대중들에게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최근 일련의 사태에서 일부 주장들은 최소한 나에게는 이 억견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은 객관적 관념론자였는데 그는 진리를 실체로(이데아의 핵심) 인식했다. 위대한 플라톤이 정의한 억견은 진리의 반대쪽에 자리 잡고 있는 부정확한 것들이다. 그리고 부정확한 것은 분명하게 진리와 거리가 멀다고 선을 그었다. 물론 우리는 진리와 억견이 혼재된 세상에 살다 보니 혹시 플라톤이 다시 이 세상에 온다 하여도 쉽게 진리와 억견을 구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