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시확대, 입시제도에 대한 고민

by 김준식

정시 확대에 대한 걱정이 온통 넘친다. 현재의 입시제도는 시스템을 넘어 이미 생명체와 같은 부분이 있다. 즉 스스로 진화하고 있다. 환경에 따라 살아남는 법을 익히고 조금씩 더 강해지는 법을 아는 무서운 생명체. 이렇게 무섭게 자라도록 만들 수 있는 자양분은 이 나라에 얼마나 많은가! 대한민국 부모들이 가지는 자식에 대한 놀라운 관심과 애정은 이 생명체를 얼마나 키웠는가? 점점 괴물처럼 공룡처럼 거대해지고 포악해지는 입시제도.


정시 확대가 문제인 것처럼 입시제도 자체가 문제라면 더 문제가 아닐까?


현행 대학입시제도가 시작된 2002년 이후 대학 입학의 주도권은 완전히 대학이 쥐게 되었다. 즉 대학이 고등학교 교육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1994년 이전의 대학입시는 그래도 대학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 들 중 대학교육에 적합한 학생을 선발했다면, 그 이후의 대학입시는 고등학교가 대학에게 적합한 학생을 양성하여 제공하는 하급 기구로 전락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한다면 현행 입시제도에서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입시를 위한 과정 외에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여기에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의도가 숨어 있는데 외형상으로는 고등학교 학생이라면 어떤 대학이라도 지원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대학이 입김이 작용하여 대학이 원하지 않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시행하는 고등학교 출신의 학생은 특정 대학의 입학이 원천적으로 봉쇄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으로 이 나라 관립 대학의 시초이며 온갖 비리와 특혜의 온상 서울대학교가 그렇다. 1969년 예비고사가 시작된 당시에는 시골 촌 동네 고등학교를 나와도 재주만 있으면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사람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경우는 불가능하고 지역균형이라는 요상한 시혜(사실은 지역, 빈부, 지위 차별의 극치라고 볼 수 있는 제도다.)로 농촌 학생들이 서울대학교에 전국적으로 한 해 몇 명 정도 입학하고 있고, 그런 제도도 없다면 아예 서울대학교 입학은 정말 꿈이 되고 만 것이다.


이런 제도의 근본 바탕은 잘 알다시피 자본주의의 핵심논리인 개인의 절대적 능력을 기본으로 하는, 그러나 지극히 평균적인 정의에 입각한 것이다. 거기에 자본주의는 두어 가지 보상을 첨가하여 잘 포장한다. 이를테면 애당초부터 기회의 균등이 불가능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교묘한 방법을 통해 진실(기회의 균등이 곧 절대적 평등이라는 것)을 은폐해 놓고 겉으로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균등하다고(상대적이라고) 매끈하게 이야기한다.


고등학교교육의 목표를 재차 들먹일 필요도 이제는 없어졌다. 대학입시라는 공룡에게 고등학교는 이미 충실한 노예가 된 지 오래다. 서울 지역에 있는 서열화된 대학의 순위를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교육의 판에서 인간교육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서울과 지역을 심각하게 차별하여 ‘In 서울’이라는 해괴한 용어도 생겨났고 그 말은 이미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버렸다. 이 극도의 차별과 서열화가 현재 우리의 교육이며 그 첨병의 역할을 학문의 전당이라고 자처하는 대학이 자행하고 있고 권력은 이것을 비호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방식이야 말로 자본주의적 권력이 꿈꾸는 인간관리요 인력개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제목이 딱 내 마음이다. Die Lebensmüden(삶에 지친) - 페르디낭 호들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