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밝혀두지만 위대한 진보의 길을 가고 계시는 선배 제현님들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다.
삼십 년 전 처음 교사모임을 가졌을 때 모이신 선생님들이 한결 같이 예의라고는 없었다. 나는 그 점이 참으로 이상했다. 모이신 선생님들의 생각은 너무나 훌륭하고 대단했는데 개인적 예절은 참으로 바닥이었다. 비록 살림은 없었지만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고는 예의범절이 전부였던 나에게 당시의 상황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예의 없음의 예를 들면 함부로 다른 사람의 거처에 들어 눕거나, 함부로 다른 사람의 물건을 사용하고, 또 아무 때나(밤이나 낮이나) 불쑥불쑥 남의 거처를 찾아가는 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못마땅하게 보였다.
스스로 ‘나는 이런 모임과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대학시절 운동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결국 예의범절과 진보노선은 조화될 수 없는 것이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 적도 있었다.
그 뒤로도 많은 시간 동안 이러한 느낌은 없어지지 않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진보적 단체에 소속되어있거나 진보적 활동을 하는 분들이 모두 그렇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다만 내가 만난 진보적 인사들 중에는 이러한 예의범절에 취약한 분들이 제법 있었다는 이야기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면서 만난 교사들이나 또는 학교 밖에서 만난 교사들 중에는 표면적으로는 대단히 진보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그분들과 교류하면서 겪은 약간의 상대에 대한(나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소홀함을 오래 기억한다. 이를테면 십 수년 전, 그 선생님은 당시 진보적 단체에 소속되어있다는 것을 자주 표명하시는 분으로서 대외적인 활동은 매우 열성적이셨으나 정작 학교 안 구성원들, 특히 교사 아닌 분들에게 매우 소홀히 대하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분은 그 후 승진하시고 퇴직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 진보적 단체 모임에 가끔 얼굴을 나타내는 분이다. 진보란 가장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활동이며 함께 걸어가야 할 길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예의범절이 완벽한 사람이라고는 이야기하지 못한다. 다만 내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분들이 외부적으로는 매우 진보적 기치를 주장하고 동시에 진보적 활동을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가까이 있는, 그리고 늘 대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은 소홀하고 또 약간은 무례한 것을 볼 때 지금도 나는 진보의 길에 대해 갈등한다. 사실 예의범절을 잘 지키면 그것은 수구 보수일지도 모른다. 예의라는 것에서 벌써 보수적인 냄새가 물씬 난다. 그래서 일부러 그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일까?라고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아니다. 진보는 가장 따뜻한 인간의 길로써 약자에게 한 없이 부드러워야 한다. 다만 대의를 위해서는 추상같은 모습을 보여야 하며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서는 매우 엄정해야 한다.
오늘 SNS에 실린 사진들을 보다가 문득 몇 분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이르렀다. 진보는 자신을 외부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길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 향하는 엄정한 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