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by 김준식

감독: 셀린 시아마 (2019)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초상화로부터 예술적 감흥을 받기는 어렵다. 물론 자화상의 장르는 조금 다르기는 하다. 뒤러처럼 스스로 잘난 체하기 위해 그린 것과 렘브란트처럼 자신의 모습을 연대기처럼 남긴 것 또는 고흐처럼 자신의 모습에 삶을 투영시키는 몇몇의 자화상 작가를 제외하고는 초상화는 의례적이거나 관습적인 경우가 대 부분이다.


특히 다른 사람의 모습을 그려주는 화가들에 의해 남겨진 초상화는 실제 인물보다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고(왜냐하면 초상화를 그릴 정도의 권력과 재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 그렇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 의해 조작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어떤 관점으로 상대를 보는가는 아무리 절대적인 권력하에서도 온전히 화가의 몫이기 때문이다.


원제 Portrait de la jeune fille en feu(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매우 단출한 영화다. 공간적 배경이나 연기자의 숫자, 그리고 서사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매우 좁다. 이 좁은 영화적 공간은 관객에게 매우 세밀한 영화 보기를 요구하기도 한다. 어쩌면 감독의 계획에 따라 우리는 매우 조밀하게 그리고 집중하면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반증하는 것으로서 영화는, 장치의 최소화와 배경 음악의 배제 그리고 비정상적인 클로즈 업과 롱 테이크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초상화의 목적은 요즘으로 치면 사진을 미리 결혼 상대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초상화를 보내는 것은 당시의 교통이나 문화적 관습에 따라 귀족들의 결혼식에서 최소한의 정보공개인 셈이다. 물론 당연히 여자에게만 강요된 일이었고 이런 관습적인 상황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을 터인데 감독은 동성애라는 독특한 소재를 끌어와 그 관습에 대한 저항을 관객에게 설득하려 한다.


본래 Queer(퀴어)는 성 소수자를 지칭하는 단어로서 일반적으로 동성연애자, 성전환자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 영화를 퀴어 무비로 분류하는 것도 영화의 중요한 주제의식이 동성연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나는 두 여자 주인공 엘로이즈(아델 에넬분)와 마리안(노에미 메를랑 분)이 연애 감정을 느끼는 지점에서부터 사랑에 빠져드는 서사의 설득력이 약간은 떨어진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 느낌은 어쩌면 매우 개인적인 생각일 가능성이 크다. 영화가 끝나고 찬찬히 분석해보니 사랑의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저항감이 영화적 서사를 스스로 방해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기간 문화적으로 쌓인 관습의 벽을 여전히 나는 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겉으로는 다양성을 인정해야 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갈등을 여전히 겪어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음악이 내 귀에 꽂힌 것은 단 세 장면이다. 마을 축제에서 나오는 여성 아카펠라와 마리안이 엘로이즈에게 오래된 악기(소리로 보아 하프시코드로 추정되는)로 연주해주는 단속적인 비발디의 사계, 그리고 마지막 관현악 합주로 이어지는 사계다. 이 음악으로 해서 이 영화의 시대 배경은 17세기 이후가 확실해진다. 아카펠라 음악은 마치 아프리카 음악처럼 매우 원시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당시 유행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찬트(Chant)를 생각해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사계 여름의 마지막 악장에 따라 변화하는 배우 아델 에넬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엘로이즈와 마리안, 그리고 하녀 소피가 친해지고 난 뒤 세명이 모여서 엘로이즈로부터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듣는다. 이 영화에서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오르페우스는 남자 동성연애의 표상이다.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음으로서 여성에 대한 사랑을 포기하고 남성을 사랑하는 동성연애자가 된다. 이 이유 때문에 오르페우스는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여성 동성애 영화에서 문득 꺼낸 남성 동성애의 상징인 오르페우스 이야기는 영화를 본 후 지금도 내내 그 의도가 아리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