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의 문화사학자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가 쓴 책 중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책 내용은 고대 아테네의 선거 이야기를 비롯해 선거의 역사를 살펴본 것이지만 나는 책 제목에 집중하고 싶다.
참 적절하고 타당한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에서 21대 총선까지 이어져 오면서 그 어느 시절도 국민을 위한 선거는 단언컨대 없었다. 정치적 입장은 다양하다. 하지만 1948년 이후 약 72년 동안 이 땅의 선거 중 단 한번 만이라도 국민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사고의 다양성 문제가 아니라 무지이거나 아니면 미친 것이다.
사실 선거는 여럿 중에 하나를 고른다는 지극히 단순한 행위이다. 뽑는 사람들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뽑는 사람이 달라질 수도 있고, 뽑히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또 그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데 이것이 민주적 정치행위이라고 보는 것에는 상당한 문제가 있다. 즉, 우연이나 즉흥성, 인맥이나 친분, 지역과 학맥 등이 매우 밀접하게 작용하고 가장 큰 문제는 돈에 의해 이 모든 가치를 한꺼번에 깔아뭉갤 수 있는 것이 선거이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한 민의의 반영 수단이라고 볼 수 있는가?
次善이라고 치자. 그나마 공정성이 보장된다면 차선이 될 수도 있다. ‘공정함’이란 ‘공평’(公平)하다는 말과 ‘올바름’(正)이라는 말의 두 가지 뜻이 포함된 말인데 기회의 균등과 동시에 엄격한 기준을 가진 제도적 장치가 담보된 선거라면 차선으로 볼 여지가 그나마 있다. 그런데 21대 총선은 어떠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기상천외한 제도 탓에 여당과 야당은 세계 정치사에 이름을 남길만한 위성정당이라는 것을 만들고 비례대표제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해버렸다. 이 이상한 위성정당의 탄생으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기회의 공정은 아예 물 건너가고 말았다. 그뿐인가? 선거 때마다 있는 정당들의 이합집산은 말할 것도 없고, 공천의 잡음으로 탈당과 입당을 번복하면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으로 바뀌는 그야말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치기 가득한 행동을 지난 70년간 변함없이 우리에게 보여준다.
정당정치의 기본은 정당의 정강을 바탕으로 하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대 국민 지지를 이끌어 내는 것이 원칙이지만 대부분의 정당은 이러한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의도적으로 이념적 혹은 지역적 감정을 자극하는 행위를 통해 단번에 그 지역에서의 그 정당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 한다. 지역감정을 이용하는 이 졸렬한 방법이 아직도 통하는(하기야 다른 나라에도 있기는 있다.) 이 나라의 민주적 시민의식은 참 유치하고 한심하다.
또 아니면 기존의 정당을 이용하여 패거리 정신을 강화하거나 아니면 권력의 주변부에 있는 부나비 같은 존재들을 끌어 모아 하나의 세력으로 이용한 다음 정치적 효용이 다하면 여지없이 뭉개버리는 수단으로 총선을 이용하고 있으니 이것이 과연 민주적 절차이며 또 이것을 통해 민의를 반영한 인사들이 뽑힐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하는 말(공약)의 대부분은 5분만 생각해 보면 모두 거짓말이고, 그들이 하는 행동은 보는 순간 위선으로 가득하다. 지금 거리에서 90도로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저 사람들의 태도는 선거가 끝나면 당선된 자는 거만한 자세로 돌변할 것이고, 낙선한 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에 지금 이 며칠, 그들은 한 없이 비굴해진다.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고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낸다. 아마도 그들은 스스로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니냐며 자위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치란, 선거란 분명 그런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사진은 구글에서 얻음